정리된 주제가 삶의 현장에서 질문으로 변화된 순간들:
새로움, ‘원래 그러한 것’에 대한 질문
노동. 커뮤니티. 공공성. 인권. 연대. 통합. 공유. 관계. 창의력.
이것은 내가 최근 읽은 어떤 문화예술사업 기획서에서 발견한 단어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단어들이 하나의 사업을 설명하는 몇 장의 기획서에 모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노동과 인권에 대해 생태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창의력까지 발동시켜 공공성과 통합, 연대를 실현하는 커뮤니티 아트를 우리는 과연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보다 사실은 이게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런 단어들의 나열과 그 사이를 얼기설기 이어붙인 말들에서 이와 같은 기획이 공공 영역에서 소통, 아니 유통되는 사회적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2015년, 창의나 공유, 생태나 통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시대적 키워드를 놓친 게으른 사람이 되는 것일까? 노동의 가치, 그것 하나도 제대로 인정되지 못함에도 쿨하고 조화롭게 흘러가는 사회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새로운 담론이나 개념,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주제가 사회나 문화 관련 공공지원사업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것이 틀리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나, 이러한 상황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말 그 주제가 현재의 나에게 중요한지를 되돌아볼 수 있을까?
넘쳐나는 새로움 속에서 놓치는 것
이것은 ‘새로움’에 대한 나의 질문이다. 수많은 문화예술기획서를 쓰고 읽는 최근, 내가 자주 발견하고 있는 것은 기획 주체의 고민이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키워드들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바뀌는 유행에 따라 개인이 소유한 물건이나 경험하는 공간/브랜드/스타일/프로그램을 바꾸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고, 그러한 속도의 흐름을 타고 새로움의 가치가 물건과 삶의 가치로 이어지는 지금, 문화예술 활동도 새로운 담론들을 더욱 빠르게 갈아타고 있다. 예술가들은 작업과정에서의 긴밀한 만남이나 관계유지를 필수요소로 두지 않기도 하고 흥미로운 문화기획들은 영리든 비영리든 각기 다른 목적을 둔 현장에서 번뜩이게 생성, 공유되고 있다. 신선하거나 흥이 넘치거나 다양한 의미를 담은 활동들은 그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전 활동과의 차별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기획의도가 담겨있다. 그래야 사회적 지원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기획을 실현하는 데에는 사람의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고 그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최소한의 인건비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이러한 사회적 지원에 대한 성사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덧 차별성, 혹은 새로움은 경쟁력이 된다. 동시에 누가 누구와 마주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불러보는 활동 같은 것은 ‘너무’ 소소하고 ‘너무’ 일상적이라 경쟁력이 떨어지는 행위가 된다. 활동의 규모와 방식은 그래서 점점 더 섬세해진다는 표현을 업고 점점 더 커지거나 복잡해지기도 한다. 특히 어떤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작업의 경우는 더욱.
무엇을 향한 새로움인가
그럼에도 계속 새로워야 한다. 단, 무엇을 향한 새로움을 상상하느냐가 중요하다. 사회적, 예술적 맥락에서 독보적인 기획력과 의미 생산을 목적으로 둔 새로움을 상상할 것인가, 혹은 다른 맥락의 새로움을 상상할 것인가.
이 글에서 나는 후자의 새로움을 강조하고 싶다. 전자의 경우는, 타인, 혹은 그의 삶을 정물로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개인의 어떤 시선을 독특한 ‘자신만의’ 시선으로 집중화시키는 작업에 개인이 몰두하는 상황도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그 개인의 정치를 해내거나 외로움을 연소시키는데 타인의 삶이 촘촘하게 도구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촘촘함은 신선함, 새로움, 심지어 섬세함이라는 긍정적인 사회적 평가를 받곤 한다. 그 평가는 다시 개인에게 어떤 기회와 사회적 인정을 부여하고 개인은 순조로운 주변 분위기 안에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는 시선은 잃게 된다. 그렇기에 진정한 새로움의 시선은 자신의 평소 생각이나 태도를 인정해내고 다른 생각과 태도를 향하는 시작점일지 모른다. 자기 부정을 기반으로 둔 자기 인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 자기 부정은 특정 사회 이슈에 대한 개인의 정리된 의견이 아니다. 그보다는 삶, 생명, 관계, 존중에 대한, ‘너무’ 근본적이라 잘 언급하지 않는 우리의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커뮤니티의 의미를 생태적으로 발견하는 창의적 통합 예술’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경우, 우리는 그보다 먼저 ‘왜 우리는 아파트 사이에 설계된 자연 속을 거닐다가 통합 예술이라는 사안에 대해 회의를 하러 모이는 삶의 구조에 있을까’를 바라보는 것으로 새로운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이런 고민 안에서 ‘일상적 행위’라 흔히 말하는 ‘삶’과 얼마나 다른 체험을 상상해내느냐로 귀결되는 문화기획들이, 삶과 예술, 일상과 프로젝트, 에피소드와 행사의 차이를 더욱 공고히 하는 현장을 자주 마주하곤 한다. 당연히 그 차이는 발생하겠지만 어떻게 그 차이를 좁힘으로써 참여자들의 각기 다른 삶을 덜 소외시킬지를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고민을 너무할 정도로 느리고 소소하게 시도하는 것이, 이렇게 스펙터클한 문화기획의 흐름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실험적인 작업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새로움은 ‘원래 그러한 것’에 대한 의심이 될 수 있다. ‘원래’ 예술은 이래야한다거나 ‘그래도’ 작업은 이정도 속도를 맞춰야한다거나 ‘그럼에도’ 교육은 이런 방법론은 갖춰야 한다는 전제들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새로울 수 있는 것이다. 원래 그러한 것이라 하기에는 그 구조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나 문화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불편하거나 사회참여의 기회가 적거나 어떤 경력이 많지 않은 사람은 특히 그러하다. 그럼 어떻게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를 소외시키지 않으며 무언가를 기획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활동의 경우, 더욱 ‘너무’ 어려운 것이 되지만 그래서 그것을 해내는 것은 진정한 새로움의 실천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향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새로움을 상상할 의지가 있는가’
새로움에 가닿는 시선
예를 들어, 공동체의 스토리와 참여자의 창의적 표현을 담아내는 교육적 담론이 중시되는 동시대의 문화예술교육사업 안에서, 만약 우리가 누군가와 마주 앉아 사과 하나를 그려내는 활동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그것을 실행하거나 그것의 가치를 설명할 용기가 있을까? 왜 이런 과정에 용기까지 필요한지, 설명의 단어들을 정리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나만의 시선을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예술활동과 교육활동에서 강조하는 ‘나만의 시선’ 말이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자기 고집의 흔적을 지우고 그 자리에 자기 맥락을 채워가는 것이, 문화예술기획을 한다고 하는 나에게도 무엇보다 필요한 과정이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4회 연재를 마감한다. 최근 몇 년간, 예술이든 교육이든 기획된 의도 안에서 준비되지 않았던 질문을 마주했던 순간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허술한 개념과 문장들 사이로 삶의 현장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당연히 원래 그러하지 않았던 여러 삶들이 이리저리 제 갈 길을 가는 그 뒷모습을, 이전보다 조금 더 멀리서 지켜본다. 온몸에 힘을 주고 내 생각 안으로 그것들을 끌어당겨 넣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계획과 기획이 습관이 되어버린 내게도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프로젝트, 사업, 교육의 영역이 아닌, 동네 놀이터에서는 더욱 그렇다. 몇 년 전 엄마와 아이가 할 수 있는 미술놀이 매뉴얼도 작성하고 예술교육에서 필요한 관계성에 대해 세미나 발제를 하던 나지만 요즘은 놀이터에서 더 놀겠다는 5살 아들에게 “그만 좀 가자!”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생태. 커뮤니티. 공공성. 인권. 연대. 통합. 공유. 관계. 창의력... 기획의 키워드가 된 삶의 주제들을 바라보다 이것들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내 놀이터 위에 뜬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저녁도 거르며 기획회의를 하고 온 내가 저녁도 거르며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아들을 과연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있을지. 슝- 아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데 나의 정리된 기획 언어들이 우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쿵 하고 바닥에 부딪힌다. 부서진 관념들을 주워 모으기 위해 바닥 가까이 몸을 굽히자 아들이 허기진 내 등 위로 점프를 한다. 나는 아들과 연대하고 관계 맺으며 이 순간을 공유하기 위해 “짠!”하고 추임새를 한다. 기획서 용어가 되지 못하는 이 삶의 순간과 추임새들을 어김없이 끌어안기 위해 나는 이제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글_최선영(예술가, vosl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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