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너머>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이야기 중 한 가지 주제를 선정, 책과 함께 읽어 내려갑니다.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 한켠에 묻어두었던 고민일수도 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전혀 관심 없던 주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통해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접근해보는 것은 어떠세요? 따라 읽어나가다 보면 그 너머의 생각들을 길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편집자주)
[가난]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가난한 휴머니즘』(이후, 이두후 역, 2007)
아직은 가난하지 않은 벗들에게
저는 앞으로 당신과 함께 ‘가난’에 대해 생각하고 써보려고 합니다. ‘가난’이라니. OECD 가입 국가이자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는 나라에서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자니, 무슨 소리인가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나라는 가난을 벗어났고, 가난의 문제는 특수한 일부 소수층의 문제가 된지 오래니까요. 가난에 대해 말해보자고 하면 단박에 ‘반(反)빈곤’이란 개념을 떠올리지만 오늘 제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반빈곤’이나 ‘빈곤 탈출’이 아닙니다. 반대로 제가 당신과 함께 찾고 싶은 길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다시 ‘가난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다시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가난으로 가는 길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언젠가부터 빈곤은 퇴치되어야할 사회적 질병 같은 것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이란 곧 실패한 사람, 무능한 사람, 낙오한 사람입니다. 제가 있는 학교의 많은 학생들도 ‘부를 창출하는 사람’이 되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군요. 이 학생들은 ‘각자의 능력대로 살 일이다’라고 냉정하게 대답하는 사람보다 분명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겠지요. 학생들만이 아닙니다. 제 주위의 좋은 분들도 역시 그러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빈곤을 없애고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마음은 분명 선량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어쩐지 모순이 있는 듯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나는 그들을 도울 자원과 수단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도움의 수단이 가난한 세계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나올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지금 잘 사는 나라들의 선량한 시민들은 그런 모순과 위선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럼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맞다는 것인가요, 하고 물으시겠군요. 아마도 이 글귀가 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난이 가난을 편들지 않으면 세상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저는 망치가 머리를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난이 가난을 편들지 않으면’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그것을 ‘오직 가난만이 가난의 편이 될 수 있다’로 이해했습니다. 부자가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난해질 때에만 가난의 편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더 많은 이들이 가난의 편에 설 때에만 지금 세상의 비참하게 조롱당하는 가난은 사라지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저는 ‘가난의 희망’이 어디서 생겨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희망은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쓰고, 더 풍족한 삶을 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 점점 커지는 데 있다는 것을. 그렇게 가난이 점점 커지면 우리는 존엄한 가난의 삶을 함께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가난의 희망을 거기에 걸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구의 대부분의 땅에서 민중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항상 다수였습니다. 서구의 시민들이 누리는 삶이 인류의 표준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건 생태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나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니까요. 만약 지구의 모든 인류가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 그건 이 별에 거대한 재앙이 될 테니까요. 그러므로 풍족한 삶을 사는 이들은 언제나 그들의 십분의 일, 백분의 일, 심지어 백만분의 일의 물자로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이 지구의 삶을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되고, 가난이 오직 벗어나야만 할 비참한 상태로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가난을 그렇게 만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잘 사는 나라의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도 자신을 볼 때 그들의 안경을 쓰고 보기 때문에 자기를 경멸하고 이웃을 업신여기게 되며, 가난한 삶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존엄함을 지켜나가기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이 굴절된 렌즈를 깨트려 밝은 눈으로 다시 가난한 삶에 스민 인간애와 연대의 방식, 삶의 기술과 예술을 회복시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책들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아이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난한 휴머니즘』도 그런 책입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가 가난의 편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자 이웃으로서 가난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이티의 대통령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 3의 길을 창조하는 데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날마다 죽음과 맞댄 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 아이티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생존해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좀 거슬리는 발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가난에 대한 해결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나라들의 원조나 도움 덕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아이티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의 가난한 사람들, 그들이 살아온 역사는 일종의 인간애의 박물관입니다.”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몇 번이나 멈추어 눈물을 훔치며 읽게 되는 책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여러 곳에서 몇 번이고 멈추어 뜨겁게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다시 읽어가야 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대학에 ‘후마니타스 칼리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기 위한 기초 교양과정으로서 이 후마니타스 칼리지에 개설된 강좌들을 이수해야만 합니다. 어떤 과목은 필수적으로 어떤 과목은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지만 무슨 일인지 그 어떤 과목에서도 이 아이티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드문 편입니다. 우리는 학생들을 영국, 프랑스, 독일의 사가(史家)들이 만들어낸 고대사의 박물관으로 인도합니다. 거기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간들에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어떤 훌륭한 인간성을 발견할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현재는 어떤가요? 우리의 미래 사회의 모습은 어때야할까요? 그럴 때조차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모여 있는 북구의 시민사회를 찾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세계의 가난한 곳을 찾아볼 때도 있지만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가 휴머니즘의 박물관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로부터 인간답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존재하지 말아야할 존재로서 가난한 존재들을 대하고, 없어져야하나 없어지지 않은 곳으로서 가난한 땅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문명화된 나라의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리스티드가 묻습니다. “왜 유독 아이티에서는 자살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일까요?” 아이티 사람들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배는 더 높으면서도 하루에 40명씩 자살을 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 묻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계를 넘어선 곳으로 옮겨 가야만 합니다. … 풍부한 유머, 온화한 성격, 곧잘 터져 나오는 웃음, 품위, 연대감 따위 말입니다. 우리 아이티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음식을 나눠먹는 전통이 있습니다. 친구나 친척이 아이를 기를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아이들을 대신 기릅니다. 우리는 수확 때가 되면 콘비(두레와 유사한 아이티 전통)를 이루어 함께 일하기도 하고, 이웃의 집을 함께 짓고 그 대가로 하루 일이 끝날 때 곡물로 나눠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들어설 수 없이 꽉 찬 탭-탭(트럭을 개조해 만든 아이티의 대중교통수단)에서 한 자리를 더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으며,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가난의 고통도 이 사람들의 친절함을 망가트려 놓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눈물이 나는 이유는, 이 아이티 사람들과 닮은 사람들이 제 기억 한 구석에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던 시절에 골목길에 왁자지껄하게 섞여있던 농지거리와 욕지거리, 터져나오던 웃음소리, 긴급한 순간에 항상 달려오던 이웃들, 들에서 밭에서 바다에서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 매일매일 근근이 차려내면서도 소박하나 품위 있던 어머니의 밥상 같은 것 말입니다. 세계의 모든 식재료가 다 들어와 있는 대형마트와 대형냉장고와 전기밥솥과 전기오븐과 가스레인지를 다 갖고서도 그 조각보 아래 밥상의 우주를 저는 창조해내지 못합니다. 우리 집에는 갑자기 닥칠 누군가를 위해 남겨놓는 밥 한 그릇이 없습니다. 아이가 울면 달려와 주는 이웃 대신 이웃의 항의를 대신 전하는 경비실 인터폰이 울립니다. 시장에선 물건 값에 실랑이 하며 흥정의 규칙, 끝전의 규칙, 떨이의 규칙을 만들어내고 지키던 사람들이 마트의 계산대에서 마주한 사람과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계산을 마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웃음을 잃었고, TV 앞에서만 바보처럼 크게 웃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이토록 파괴한 것은 가난입니까, 풍요입니까. 우리가 지금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풍요한 삶 속에 있겠습니까, 가난한 삶 속에 남아있겠습니까.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조달 가능한 세계는 돈이 있는 한 인간이 신과 같이 전능해질 수 있다는 착각을 주입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의 결여를 인식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의 도움이 없이는 총체적으로 빈곤한 자입니다. 그는 대가 없이 도움을 주고받을 친구와 이웃이 없고 그렇게 쌓아온 관계도 없습니다. 그는 밥도 할 줄 모르고, 집도 지을 줄 모르고, 옷도 만들 줄 모릅니다. 고장 난 물건을 고치는 법도, 필요한 물건을 구하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나누는 방법도 모릅니다. 돈이 부족할 때 다 같이 목돈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모릅니다. 시장과 신용카드가 없다면 그는 거지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티드는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결집시킬 수 있는 풍부한 경험과 지식, 기술과 에너지, 그리고 힘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창조성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티를 비롯해 멕시코, 브라질,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점점 늘어나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이 파노라마처럼 보여 준 인간적인 인고(忍苦)에서 말입니다.”
그럼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해내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있으며 혼자서는 못하는 많은 일들을 함께 만들어냅니다. 한 몸통에서 나온 수없이 많은 머리로 이루어진 히드라처럼 아무리 목을 잘라내도 그들은 죽지 않습니다. 한 머리가 잘리면 다른 머리가 대신 합니다. 피터 라인보우의 책 『히드라』(갈무리, 2008)를 보세요. ‘장작 패는 남자들’과 ‘물 긷는 여자들’이 이루어 온 세계와,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 끝내 살아내는 ‘더러운 사람들, 위험한 사람들, 미개한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들인지를 다시 알게 될 테니까요.
생각해보면, 예로부터 가난이 항시 비참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여겨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청빈’은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오랫동안 지식인의 도덕률 중 하나였습니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부자’가 이렇게 존경할만한 인물로서 추구되는 것이야말로 극히 예외적인 이 시대 특유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돈이 신(神)이 된 시대의 결과이지만 또한 그것을 이론적 사상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다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정당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난의 감각’을 상실하고 ‘가난의 미학’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름다운 가난’이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용모순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난에 대해 게으름, 무능력, 주체화의 실패 등등의 온갖 부정적 언사와 수사를 붙이며 가난을 문명사회가 퇴치해야할 과제로 만들었습니다. 가난은 문명화된 사회의 부끄러운 치부가 되었습니다. 국제기구와 잘사는 나라의 시민들은 원조프로그램을 통해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빈곤퇴치 프로젝트는 일견 휴머니즘적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휴머니즘이 아니라 그들을 대상으로 자선을 베푸는 자신들의 휴머니즘을 돋보이게 할 뿐입니다.
사실 지금과 같은 빈곤 개념, 즉 퇴치되어야할 것으로서의 ‘빈곤’이란 개념은 ‘발전·개발·진보·풍요·복지’와 같은 개념과 함께 서구사회의 지배엘리트들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특히 유엔 밀레니엄 개발목표에 ‘반빈곤’이 중심 의제로 설정된 이후 빈곤퇴치 사업에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빈곤퇴치의 실상은 우리의 풍요로운 세계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고 격리시키는 프로젝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사회보건과 위생의 개념은 오염원과 더러운 사람들을, 안전이 불안전과 위험한 사람들을, 발전이 저발전의 개념과 미개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만들었듯이 풍요로운 사회가 수립한 반빈곤 정책은 때로는 복지와 원조라는 통치방식으로,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가난한 풍경과 가난한 이들을 사회로부터 제거해왔습니다. 발전, 환경, 평등, 원조, 시장, 참여, 계획, 인구, 빈곤, 생산, 진보 등등 우리가 기대어 생각하는 개념들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고 세계를 보는 관점을 어떻게 왜곡시켜왔는지 알고 싶다면 『반(反)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이란 책을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풍요로운 삶의 조건이 필요하고 그건 결국 성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가난 속에서 과연 풍요로운 삶, 인간다운 삶이 가능할까, 의심하신다면,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11)도 함께 읽어주세요.
빈곤은 발전과 성장의 쌍생아입니다. 복지국가가 없다면 빈곤국가도 없습니다. 가난을 만든 것은 가난이 아니라 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처한 비참한 빈곤 상태를 끝내기 위해 우리가 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제거해야 한다면, 그것은 가난이 아니라 풍요일 것입니다. 가난의 퇴치가 아니라 풍요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가난한 삶을 비참으로부터 구해내고 가난한 이들에게 존엄과 당당함을 되돌려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으로 가는 길을 찾습니다. 고립된 가난은 무력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난해지고 싶습니다.
글_채효정(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강사,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