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된 주제가 삶의 현장에서 질문으로 변화된 순간들:
장애인문화예술교육이 도움반 교실에서 만난 질문
“동현이와 철희가 가위, 바위, 보를 하면 동현이가 이길 것이다, O! X! 자자, 선택해보자.”
아이들이 분주해진다. 별로 시끄럽지는 않다.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학생이 15명 중학생 중에 5명 정도이기 때문이다. 평소 좋아했던 친구의 뒤편으로 조용히 따라가 서거나 O와 X의 경계선에 멍하니 서있는 학생도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퀴즈의 답을 찾을 때 어떤 과정을 거칠까? 동현이와 철희의 가위, 바위, 보 실력을 수치로 계산하고 ‘경우의 수’라는 지식을 활용해 문제를 풀어야 할까? 아니면 그냥 평소에 좋아하는 친구를 선택하고 씩 웃고 있으면 될까? 대체 이런 문제는 왜 내는 것일까?
도움반에서 진행되는 장애문화예술교육사업을 1년 넘게 보조하던 나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해볼 만한 것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부터 교육 사업을 진행하는 강사로 활동에 참여했다. 우리는 새로운 놀이를 시도해보며 각기 다른 능력, 속도,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해볼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을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더 정확히 말해서, 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 가지고 있는 구조나 방식이,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놓이도록 재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장애/장애인을 향한 활동을 상상하기
사실 장애 학생들과 몇 년간 만나며 내 스스로 ‘장애인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색연필 하나 잡을 수 없거나 가위질도 힘든 아이, 혹은 언어 소통이 쉽지 않은 학생이 참여 인원의 절반을 넘는 경우를 자주 접하면서 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심지어 이런 창작활동보다는 사회복지나 치료라고 일컫는 활동이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아닐지 고민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질문이 처음부터 정해진 답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무기력함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기존의 ‘문화예술교육에의 실현’을 향한 채로 장애를 만날 경우, 장애의 요소들은 다채롭게 경험 가능한 예술 활동을 방해하는 원인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 예술, 교육, 심지어 어떤 것의 실현, 이러한 개념들을 뒤로 하고 장애/장애인을 향한 활동을 상상할 경우에는, 우리가 같이 해볼 만한 것들이 아주 많았다. 할 수 없는 것들을 기반으로 교육을 기획할 것인지, 현장과 사람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할 것인지에 따라 나의 태도와 학생들의 참여 범위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함께 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았고 그 방법 중 하나가 새로운 OX퀴즈였다. 지식에 의존해 풀어야하는 문제 대신, 그 현장에서 놀이로 답을 검증할 수 있는 문제를 준비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식의 문제를 냈던 것이다. 강사가 문제를 먼저 내고 수업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OX를 선택한 후 그 자리에서 문제의 답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진행된 우리들의 10여 가지 놀이들은 모두 학생들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기획, 진행되었다. 새로운 재료, 흥미로운 스토리, 다른 장르간의 결합 등이 활동 안에 담겨있었지만 그것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평소 잘 싸우던 A학생과 B학생, 보조 선생님에게 자주 의지하던 C학생, D학생과 E학생 사이에 끼고 싶어 하는 F학생 등 아이들의 일상 이야기가 놀이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싸움이나 놀림, 질투 등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도 그대로 드러나도록 기획했다. 그리고 아름답기만 하지 않은 교실 속 이러한 관계들은, 오히려 솔직하고 다이나믹한 놀이의 순간들을 만들어냈고 동시에 공식화된 놀이 안에서 인정되고 표현되었다.
함께, 그저 함께 놀기
놀이에는 완성이 없으며 잘 하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의 변형도 무궁무진하다. 작은 그림 한 장도 놀이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입고 많은 이들과 공유될 수 있다. 그림을 통해 놀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다가 그림 조각을 맞추고 다시 그것을 뛰어넘고. 이어지고 이어지는 상상의 작업 속에는 정해진 목표가 없다. 마음껏 즐기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면 된다. 놀이 진행자가 넉살 좋게 추임새를 할수록 평소 무게를 잡던 사람부터 자신감이 적은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교육활동 외에도 예술프로젝트나 개인 창작활동도 놀이의 방식으로 풀어내곤 한다. 5살 난 아들과의 시간도 다양한 놀이로 채우려 노력한다. 그래서 얼핏 놀기‘만’하는 삶의 방식으로 이러한 활동이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와 놀기‘만’ 하는 것도 사실 참 힘들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닌,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놀이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아주 치밀하게 준비를 해도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 안에서 가능한 것을 찾는, 역시나 술렁술렁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업화, 프로젝트화 되어 진행되는 공식적 문화예술/교육활동은 사실 매우 치밀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기획의 섬세함이라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 섬세함은 꼼꼼한 계획 안에서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미묘한 현장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어느 날은 대체 왜 이렇게 놀기만 하는지 의아할 정도로 허술한 시간들도 참여자와의 관계 안에서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실행해보는 것이, 사실은 그 섬세함이다. 그리고 새로이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섬세함은 한 번쯤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상상한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한 채로 다른 가능성이 실현되는 현장을 조금 더 자유롭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현이와 철희가 가위, 바위, 보를 하면 동현이가 이길까?”
이 퀴즈를 풀기 위해 내가 아이들에게 외쳤던 힌트는 사실 나를 향한 힌트이기도 하다.
“동현이가 지금 머리 뒤로 주먹 쥐고 준비하고 있다!”
“철희가 저번처럼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데?”
“자, 우리 같이 누구누구 이겨라 하고 응원해보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응원의 방식과 종류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활동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깊은 계획을 세워본다.
글_최선영(예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