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된 주제가 삶의 현장에서 질문으로 변화된 순간들:
공공예술프로젝트, 문화예술교육의 경험 사례를 중심으로
“어떻게 사정 다 봐가며 작업합니까”
일상에서도 흔히 듣는 말이지만, 어떻게 하면 사정을 다 봐가며 매번 다르게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오늘도 머리를 굴려본다. 머리를 굴리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여야 그야말로 자연스러울 텐데,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앞으로 연재할 네 편의 글을 통해 사정 다 봐가서 내용과 방식을 바꿨던 그 머리 굴림의 흔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예술가, , 문화예술교육 컨설턴트 등 조금씩 다른 정체성들이 점점 나열되고 있는 것을 보면 나의 활동 언어가 다양한 범위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이 감지된다. 매번 다른 상황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며 이전에 해왔던 활동의 매뉴얼을 반복하는 것을 피하려하기에 집중되지 못하는 정체성들이 자꾸만 퍼져나가기만 하는지도 모른다.(필자의 말)
‘예술의 역할’이라는 주제가 진안 산골과 만났을 때
“선생님은 해봤어요?”
너의 이름은 뭐냐는 나의 질문에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은 이렇게 응답했다. 태연한척 그럼 우리 무엇을 해볼까 물었더니 역시나 같은 답변, 아니 질문이 돌아왔다.
몇 년 전, 도시의 예술가들이 전라북도 진안의 산간지역을 찾아가 동네 마을회관에서 보름간 머무르며 산골에서 예술의 역할을 발견해보는 공공예술프로젝트가 있었다. 참여 작가로 함께 진안에 내려간 나는 수차례의 기획회의를 하며 진안의 청소년들과 무엇을 할까 여러 가지 계획을 짰다. 청소년들과의 교육활동에 다양하게 참여해왔던 경험이 있었기에 만남부터 활동의 마무리까지 나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진안에서 4명의 남학생을 마주했다. 인사는커녕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얼마나 만만한 상대인지 귓속말을 나누던 아이들은 첫 만남 내내 야한 농담과 질문만을 쏟아내었다. 산골 안에서의 예술이라는 주제는 그 순간 어디론가 사라졌다. 교육/창작/활동/사업을 기획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안전하게 다듬어진 어떤 주제는 현장에서 그렇게 무너졌다. 기획과 방식에의 새로움에 집중했던 나의 ‘흥미’는, 애정표현이 서툰 아이들의 반응에 부딪혀 보기 좋게 튕겨져 나갔다.
커리큘럼이라고 문서에 가득 채워왔던 활동들을 모두 접고 우리는 일주일간 함께 놀기 시작했다. 치킨을 먹고 운동장을 뛰고 노래방을 휘젓고 심지어 운 좋게 첫눈도 함께 맞았다. 야한 농담은 줄어들었지만 우린 보통 창작 혹은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부르는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다. 결과물은 더더욱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고분고분하게 나의 계획을 따라오는 대신, 각자의 욕구를 표출하며 다른 방식을 요구했던 아이들은 조금씩 우리의 만남을 즐기기 시작했다.
우린 빈틈없이 일주일을 놀았고 나는 매일 그 시간들을 기록했다. 아이들과 두 세 시간을 놀고 숙소로 돌아오면 노트북을 켜고 그 날의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글로 적었다. 누가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했는지, 누가 길가의 형광등을 휘둘러 깨트렸는지, 누가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누가 불만 섞인 말투로 가족의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나중에 만나 꺼내보자며 우리들의 타임캡슐을 뒷산에 묻었다. 그 안에는 서로에게 쓰는 편지도 담았다. 좀 오글거리기까지 하는 이런 활동에 아이들은 매우 진지하게 참여했다. 그건 그동안 서로의 욕구를 공감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우리가 ‘관계’가 조금이라도 작용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 시간의 편지 쓰기를 위해 일주일간의 ‘관계 맺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진안의 아이들은 그랬다.
그렇게 프로젝트의 공식적 활동은 끝났다. 하지만 나의 작업은 남아있었다. 나는 도시로 돌아와 그동안 기록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았다. 놀고먹은 우리의 이야기는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았다. 그럼 왜 그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누군가 어떤 활동을 기획할 때 특별한 소재로 인식되었을까. 산간지역에서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기에 교육대상자가 되어야한다고 판단되었던 아이들의 삶이 제3자에게 새로운 키워드로만 인식되었다면, 어쩌면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들, 그리고 나를 향한 교육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게임 디자이너와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함께 시간을 보냈던 4명의 아이들과 나는 보드게임 안에서 자신의 능력이나 개성을 발휘하는 각각의 캐릭터가 되었다. 예를 들어, 오토바이를 타던 A는 남들보다 한 칸을 더 많이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캐릭터가 되었고, 아이들을 불러 모으던 나는 여러 캐릭터들을 끌어당기는 능력의 캐릭터가 되었다. 게임의 배경은, OO노래방, OO학교, 운동장, 청소년 수련관 등 우리가 시간을 보낸 실제 장소들로 디자인했다. 그리고 모든 활동에서 언제나 중심이 되었던 ‘야동’ 이야기는 긍정적 의미의 특수카드, ‘야동카드’로 재탄생되었다. 보드게임의 제목은 마지막 날 이야기를 담아서 “타임캡슐을 찾아라”로 지었다. 하지만 한 명의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들과 경쟁에서 승리해서 타임캡슐을 차지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캐릭터 특성을 발휘하면서도 서로 협력하여 정해진 미션을 수행해야 모두가 동시에 타임캡슐을 찾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만약 협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함께 게임에 실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보드게임 제작이 완성이 아니었다. 진안에 대해, 그곳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는 어떤 사람들과 이 게임을 하는 것으로 작업은 완성되고 더욱 풍부해진다. 대체 ‘야동 카드’가 왜 있는지, 중학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데 나는 왜 가만 내버려뒀는지, 왜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고 치킨을 먹으며 놀러 다녔는지를 설명하는데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매 순간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뒷이야기를 전하는 그 상황이, 이 작업이 뒤늦게 발견한 주제이다. 그 안에는, 프로젝트 전 기획회의에서 공부했던 도시와 농촌 간 문화격차, 도시집중현상, 농촌의 할렘화, 산간지역 청소년 문제 등도 어느새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타인의 삶을 담론화, 이미지화했던 누군가의 시선을 확인하고 되묻는 질문들도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사실 나를 향하고 있었기에 당황스럽도록 색달랐다.
“선생님은 해봤어요?”
예술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던 예술가는 민망했던 그 질문을 다시 떠올려본다. 예술이든 교육이든 사람과의 만남이 전제되는 활동이라면 그것은, 정리된 질문이 아닌 민망하고 당황스러운 질문을 발생시켜야 할지 모른다. 개인의 시선이나 태도가 섬세하지 못했음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 더욱 민망해지고 자신의 부족함에 당황하게 되는. 그래서 아이의 질문은 나의 질문으로 다시금 들린다.
“일단 만나서 시간을 보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해봤어요?”
일단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 전에, 여전히 ‘선생님’으로 타인의 삶 안에 더 자주 등장하는 나는, 예술 혹은 교육이 얼마나 민망한 순간을 자주 마주하게 되는지를 발견하고 싶다.
글_최선영(예술가)
☞ [공공예술프로젝트②]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그 사이 함께 해볼 만한 것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본다면 타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