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기념관>의 ‘운동화 프로젝트’
지난 6월 10일. 매년 6월이 되면 <학이당>과 <이문서당>에서 공부하는 빛내의 문탁 출입이 뜸해진다. 문탁에 왔다 하더라도 몸만 와있지, 핸드폰과 합체된 빛내는 노상 통화 중이다. 빛내의 유체이탈한 영혼은 <이한열기념관>과 행사준비로 장기 출장 중이다. 빛내는 <이한열기념관> 관장으로, 6월이면 가장 바쁜 스케줄을 보내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올해 나는 뭔 바람이 불었는지 빛내를 만나러 신촌으로 달려갔다. 빛내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였다. 6월 10일자 신문에는 6월 9일 열린 ‘이한열 기념비 제막식행사’에 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이날 제막식을 비롯해서 문화제 행사도 열렸다. 연세대 힙합동아리 학생들이 “고상한 동아리도 많은데 왜 우리 같은 애들에게 공연을 의뢰하셨어요?” 의아해하면서도, 나름대로 이한열과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를 공부해 자작곡 공연을 마쳤다고 한다. 전국을 강타한 ‘메르스 공포’로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학교가 휴업에 들어간 6월 9일 이들은 어떻게 이런 행사를 치룰 수 있었을까? 그것이 알고 싶었다.
“6월 8일 행사 전날 공연에 참여하기로 한 팀이 모두 모였어요. 단 한 팀도 메르스 때문에 공연을 취소할 이유는 없다는 의견이었죠. 책임자로서 지휘자님이 걱정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공연팀들은 ‘우린 가진 게 몸밖에 없다. 괜찮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 일정대로 문화제를 치룰 수 있었어요.”
전날 행사를 치르고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빛내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몇 주째 일에 치여 살며 금요일 밤이면 “오늘이 금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이면 얼마나 좋을까?” 한탄스러웠다는 빛내와 <이한열기념관> 상근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들의 피로가 확 느껴졌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가며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해치우며, 현재 <이한열기념관>에서 기획하고 있는 전시는 ‘운동화 프로젝트’이다. 1987년 6월 9일 교문투쟁에서 이한열이 쓰러지며 떨어뜨린 한 짝의 운동화를 최대한 당시 상태에 가깝게 복원하는 작업이 최근 유물 보존처리 전문가 손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이한열기념관>에서는 복원된 운동화와 보존처리문제를 해결한 이한열의 의복과 가방 등을 함께 전시하는 ‘운동화 프로젝트’를 6월 9일부터 9월 25일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이한열이 남긴 한 짝의 운동화는 오른발이다. 기획전에는 이한열이 남긴 오른발에 자신의 왼발 운동화를 나란히 놓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한열의 어머니, 동아리 선배, 쓰러지는 이한열을 부축했던 친구, 그리고 현재 이한열장학금을 받는 학생 등 각자의 왼발에는 자신의 소감이 적혀 있다.
“한열이와 우리들이 만들고 싶었던 세상은, 건강하고 밝고 웃음이 넘치고, 같이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애도와 경건함, 그게 아니라 더 밝고 재밌는 것, 그걸 그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왔다. 운명처럼 마주칠 그 날,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친구, 미안하다. 나는 올해에는 더 밝고, 더 즐거운 얘기를 우리의 청년들과 해보려 한다.”(경제학과 동기 우석훈)
이번 주 월요일부터 학생들의 등교가 시작되었고, 메르스는 아직 잠잠해지지 않았다. 약국과 할인매장의 마스크가 동이 났고, 외식업체가 울상을 짓고, 내수경제가 불안하다는 우울한 뉴스는 연일 계속되고 있다. 국내에 들어온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한국의 메르스는 중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아직 그 전모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경과보고를 했다. 28년 전 스물 두 살의 이한열이 거리로 나갔던 그날은 어떠했을까? 지금과는 다른 이유였겠지만, 어떤 불안과 긴장이 함께 했을 것이다. 시간이 된다면, <이한열기념관>을 찾아 그가 남긴 오른쪽 운동화 옆에 각자의 왼발을 놓아보자. 그리고 곰곰이 ‘나의 왼발’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러면 막연히 우리를 움츠려들게 하는 ‘메르스 공포’에도 좀 더 의연히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글_박연옥(문탁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