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너머>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이야기 중 한 가지 주제를 선정, 책과 함께 읽어 내려갑니다.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 한켠에 묻어두었던 고민일수도 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전혀 관심 없던 주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통해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접근해보는 것은 어떠세요? 따라 읽어나가다 보면 그 너머의 생각들을 길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편집자주) |
[감정적 삶]에 관한 네 번째 책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궁리, 2013)
세월호 1주기 추모 집회에서 경찰이 광화문 광장을 원천봉쇄하고 시민들을 향해 최루액을 쏘는 등 과도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연행된 시위참가자 중에는 유가족도 있으며, 심지어 진압 과정에서 유가족 어머니의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렇듯 희생자와 유가족, 즉 피해자가 보살핌과 배려가 아니라 모욕의 대상이 된 것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백일째 되는 날,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 의장은 세월호는 일종의 교통사고이기 때문에 천안함의 보상/배상과 동등한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의문투성이의 참사를 우연적이고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교통사고에 빗대 진상규명을 통한 정치적 애도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유가족을 보상금을 더 받아내려고 떼쓰는 이익집단으로 프레임화하는 비인간성은 경악스럽다. 그가 인권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해야 할 법조인으로서 오랫동안 지방법원의 판사로 재직해왔다는 사실은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왜 엘리트 법조인이 자식을 잃고 한시도 깊이 잠들지 못했을 유가족의 슬픔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가? 왜 생각할수록 기막힌 참사를 적정한 보상액으로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비즈니스인 양 취급하는 것일까? 정녕 그는 누군가의 소중한 삶이 의문투성이의 사고로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버렸다는 데서 슬픔과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나 비단 법조인 한 사람뿐이겠는가! 사회 속에서 훌륭한 어른의 자질을 갖춘다는 것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엄한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 추론에 무능하고 ‘찌질하기만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교육받지 못한 하위계급이나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감정에 대한 불신이 지독한데 이는 단지 인격적 결함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온갖 형태의 배제와 억압으로 뒤덮인 세상 속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할 길이 요원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Poetic Justice: The Literary Imagination and Public Life, 1996)은 인간행동을 모델화하는 기술적인 방법, 특히 경제적 공리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인간적인 공감을 거부하는 경향이 커진 오늘날의 정치적 삶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시도하는 뜻깊은 책이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저자는 오늘날 법정에 선 재판관이 겪는 문제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이미 배운 듯이 법은 사회적 정의를 지향하고 재판관은 그 법을 집행하며 사회적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법정에서 재판관이 마주한 것은 “얼굴 없는 정체불명의 무분별한 대중의 한 사람”(p.14)에 불과하다. 근대 사회의 재판관은 법정에 선 한 사람의 삶에 감정을 기울여 공감적 동일시를 하기보다 인간 삶의 복잡성을 도표 형식으로 그리면서 모든 것을 아우르고자 하는 과학적 기획인 정치경제학에 영혼을 저당 잡힌 채 다분히 기계적으로 죄와 벌의 무게를 달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법경제학의 공리주의적인 합리성에 지배받고 있는 법정의 현실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렇듯 비인간화의 위기에 처한 재판관을 구하기 위한 처방으로 문학, 특히 소설 읽기를 제안한다. 그녀는 타자의 슬픔과 분노에 공감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갖춘 재판관의 출현을 기대한다. 이 책은 마사 누스바움이 미국의 대학에서 〈법과 문학〉을 강의해온 경험을 담고 있는데, 왜 문학이 정의로운 재판관이 되기 위해 필요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녀는 시카고대학 로스쿨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단 한 명뿐이며 비록 경계선을 그었지만 시카고의 빈민가와 이웃한 강의실에서 이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을 읽은 일이 왜 가치있는지 이야기한다.
『미국의 아들』은 흑인 청년 비거 토마스가 부유한 백인의 운전수로 취직해 우발적으로 주인집 딸과 자기 애인을 살해한 이야기를 통해 미국 내 도시 하층민과 흑인들의 소외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누스바움은 “그렇게 서서 그는 자신이 살인을 한 이유에 대해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죽였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이유를 해명하려면 자신의 삶 전부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p.14)는 문장에 주목한다. 이 문장이 형벌 선고에서의 재량권과 자비에 관한 논의와 관련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재판관이 공정하게 피고를 재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몇 개의 사실과 증거들이 아니라 이와 같이 감추어진 진실, 즉 흑인으로서의 소외된 삶의 경험에 가닿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죄와 벌이라는 기계적인 관점이 아니라 고유의 개별적인 존재로 보아야 할 필요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과했을 때만 재판은 불평등을 심화, 재생산하지 않고 사회적 정의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계급, 인종, 성별, 국적 등의 차이로 인해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무지 속에 놓여 있으며, 무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삶을 경험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심지어 수많은 차별의 경계들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노출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타자에 대한 소외와 폭력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해보인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타자의 삶을 가늠해볼 수 있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이 소설을 옹호하는 이유는 소설이 자신과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도록 요구하고, 그들의 욕망과 필요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독자를 이성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관찰자가 되게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소설은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p.16)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옹호는 미국의 보통법을 관통하는 경제공학적인 합리성이 인간의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법철학자로서 공리주의의 합리성을 옹호하는 한편으로, “모든 사람을 하나로 고려하며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공리주의의 제 1원칙의 한계를 염두에 둔다. 그녀가 19세기 중반에 발표된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주목하는 것은 이 작품이 벤덤의 공리주의 철학 및 정치학이 풍미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과학적 정치경제학과 정치적 상상력에 대한 규범적 시각의 한계를 풍자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토머스 그래드그라인드는 교장이자 경제학자로서 “자와 저울, 구구표를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인간성의 어떤 쪼가리라도 무게를 달고 치수를 재”(p.61)는 공리주의자이다. 그는 질적인 차이를 양적 차이로 축소시키고 개별 인간의 삶에 대한 정보를 취합해 질적인 차이를 없앤 총합 혹은 평균요용이라는 결론을 진리로 숭배한다. 그가 교장으로 재직 중인 그래드그라인드 학교는 문학을 쓸데없을 뿐만 아니라 불온하다고 보기 때문에 감정교육을 실시하지 않는다.
그래드그라인드 학교의 이성교육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이 학교의 공리주의자 선생은 자신의 학생인 씨씨 주프에게 일정 기간 동안 10만 명의 선원이 장거리 항해를 떠났는데 그중 500명만이 익사했다는 사실을 말하며 상당히 낮은 수치가 아니냐라고 묻는다. 그는 인간을 단순히 만족의 단지나 혹은 만족이 위치하는 자리 정도로 간주하는 경제적 관점에서 공리주의적 가치판단의 우월성을 증명해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인 씨씨 주프는 이러한 낮은 퍼센트 따위는 “죽음 사람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p.151)고 감정적으로 대답한다. 숫자로 표시된 분석은 사람 목숨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반면에 씨씨의 감정에 충실한 대답은 죽은 이들에게 인간성의 가치를 부여한다. 죽은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 삶을 상상이나 느낌에 의거하여 대한다면 우리는 굶주림에 대한 어떤 수치도 괜찮다고 받아들이거나 승객의 안전에 관한 통계를 그저 용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성은 사물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을 따라 유익한 것이 되며, 이러한 너그러움 없이 이성은 차갑고 잔혹한 것이 될 것”(p.103)이라는 저자의 경고는 ‘온전한 인간’을 기르기 위한 감정교육의 필요성을 제안한다고 볼 수 있다.
글_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시적 정의』(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옮김, 궁리, 2013)
<목차>
서문
1장 문학적 상상력
2장 공상
3장 합리적 감정
4장 재판관으로서의 시인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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