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서재
『원효 :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박태원 저, 한길사, 2012)
“깨달음의 길은 넓고 확 트여 걸림이 없고 범주가 없다. 무엇에 기대는 것이 아주 없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음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의 다른 가르침이 모두 깨달음의 가르침이요, 온갖 학파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이 없으며, 온갖 법문이 다 진리에 들어갈 수 있다.” _ 원효
원효를 만난 까닭?
여러 스승들 중에서 내게 가장 먼저 오신 분은 원효였다. 왜 그랬을까? 이 고백과 의문 사이에는 다소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우리 가족사에 있다. 할아버지의 이른 소천(召天)으로 스물여덟에 홀로 되신 할머니는 서둘러 개종했다. 어린 두 딸과 아들을 키웠던 전남 신안 증도의 가난한 할머니 집은 섬 선교를 위한 전도사들의 아지트였다. 6․25한국전쟁 당시 증도의 하얀 백사장에서 처참하게 순교한 문준경(1891~1950) 전도사를 비롯해, 그의 신앙적 딸인 백정희 전도사가 모두 할머니 집을 거쳐 갔다. 아버지는 문 전도사의 어린이 성경학교 제자였고 그 영향으로 목사가 되었다. 사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집안 전체가 전쟁 이후 개종해서 목사가 여럿 배출되었다. 아버지는 또한 양도천(1924~2011) 목사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양 목사는 1964년에 세계일가공회[우주일주평화국(宇宙一主平和國)]라는 신종교를 창시하고 계룡산에 들었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오래된 앨범에서 그 분들과 수시로 교유했다. 아버지는 양산리(전남 광산군), 용화리(충남 금산군), 내양리(전남 지도면), 원산리(전남 신안)로 이주하면서 교회개척과 선교를 이어갔다. 아버지의 삶은 목사였으나 염장이, 모줄잡이 노래꾼, 새마을 지도자, 의사로도 살았다. 나는 그런 목사의 지난한 삶이 싫었고 그래서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 예술가는 내가 선택한 최고의 길이었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고 나는 20대를 온전히 연극에 미쳐 살았다. 스물두 살 무렵, 그 길에서 원효를 만났다. 원효는 내 아버지의 삶이나 아버지 스승들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자유로웠다. 1990년 봄, 원효를 만난 지 1년 여 만에 나는 원효의 정신으로부터 사유한 ‘대승(大乘)’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첫 개인전을 치렀다. 목포 문화카페 ‘땅끝’에서였다. 그 때 내가 원효를 읽었던 책은 문고판 크기였으나 아주 두툼한 불교서적이었다. 나는 원효에서 내가 가야할 길을 찾았다. 원효가 내게 온 것인지 내가 원효를 찾은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그 까닭은 너무도 명확했다. 나는 자유를 원했고 그 자유에서 내 삶이 온전히 부서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부서진 자리에서 예술이라는 들꽃이 피어났으면 했다.
다시 원효를 찾다
6월 초에 파주 출판단지를 찾았다. 출판도시문화재단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 놓고 아이들과 출판단지를 산책했다. 그러다가 한길사 북카페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나는 다시 원효를 만났다. 1988년, 아니 89년부터 지금까지 원효를 잊고 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을 깊이 읽거나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삼국유사』와 같은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지속적으로 원효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원효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집어든 책이 『원효 :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이하 『원효』)였다. 이 책은 원효의 사상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아주 대단한 길라잡이면서 동시에 평전이었다. 책을 집어 들어 후루룩 넘기면서 책의 느낌을 살피니 말글이 흐르는 문장들의 유려한 색채가 좋았다. 특히 뒤쪽에 정리해 놓은 원효 사상의 개념적 해설은 그동안 느낌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수 있어 더 없이 훌륭했다. 『원효』를 읽으면서 이참에 솔에서 나온 이재호 옮김의 『삼국유사』와 다른 역자의 책도 읽고 싶어 김원중 선생이 풀어서 옮긴 민음사 판 『삼국유사』도 구입했다. 두 책이 공유하는 지점은 『삼국유사』에서 원효 이야기가 있을 뿐이지만 먼 과거의 시대를 ‘풍경’으로 볼 수 있는 『삼국유사』는 『원효』를 보는 우물창이기도 하다. 『원효』의 속표지에 쓴 글을 보자.
“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에서 가족이 망중한을 보냈다. 한길사에서(한길북카페), 이 책과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 2권, 김언호 사장의 『책의 공화국에서』를 구입했다. 아루 4권, 모세 한 질-과학 탐정 브라운, 영이는 퀼트. 2014. 6. 7.”
나는 문화재단 카페 바깥 테라스에 앉아서 『원효』를 읽기 시작했다. 사람의 생각이란 한 번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 밑에 가라앉는 것이어서 아주 잊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던 원효의 세밀한 삶의 구석들이 책과 더불어 선명해졌다. 박태원 선생은 어려운 한자어의 개념을 자신의 어법으로 쉽게 풀어서 다졌다. 때때로 그는 다른 옮긴이들의 개념과 비교되었는데, 생각보다 가슴에 더 밀착되어서 들어왔다. “원효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용어 해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원효의 심중에 깊이 파고든 꼴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리고 씻고 먹고 잠드는 순간들조차 여유를 두지 않고 원효를 읽었다.
용어 해설의 첫 개념은 ‘각의(覺義)와 불각의(不覺義)’다. 이 말을 해설의 첫 머리에 둔 까닭은 이 개념이 원효 사상의 첫 샘물이기 때문이다. 박태원 선생이 풀어서 해설하는 뜻은 이렇다. “깨달음과 관련하여 마음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상반된 면모. 마음은 시각과 본각을 내용으로 하는 ‘깨달음의 면모(覺義)’와, 불각을 내용으로 하는 ‘깨닫지 못하는 면모(不覺義)’를 모두 지니고 있다. 이 두 상반된 잠재력의 구현 과정을 모두 밝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 능력을 깨달음의 길로 향하게 하는 것이 『대승기신론』 심생멸문의 구성취지다. 원효는 이와 같은 『대승기신론』의 관점에 서서 각(覺)의 인간관을 전개해 간다.”(341p)
각의와 불각의 논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토굴체험과 연관되어 있다. 본문에서 그 부분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의 나이 45세인 661년(문무왕 1년)의 일이다. 지난번 육로에서 실패했기에 이번에는 해로를 선택한다. 당시 당나라로 가는 신라의 해로 기점인 남양만 당항성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성환과 천안 사이에 있는 직산에서 폭우를 피해 무덤을 토굴로 알고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 일을 전하는 기록들(『송고승전』, 『임간록』, 『종경록』)의 내용은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토굴로 알고 잘 때는 편안하다가 무덤인 줄 알고는 귀신이 나타나 놀랐다’고도 하고(『송고승전』), ‘자다가 갈증이 나 달게 마신 물이, 깨고 나서 보니 해골 물 혹은 시체 썩은 물이었다’고도 한다(『임간록』, 『종경록』). 이때 원효는 ‘모든 존재와 일이 결국 마음의 구성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라는 도리를 직접 확연하게 깨쳤다고 전한다.”(38-39p)
우리는 원효가 말하는 ‘마음의 구성’에서 깨달음의 면모(覺義)와 깨닫지 못하는 면모(不覺義)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몸’ 체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책은 전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원효는 공부로서의 ‘사유체험’이 먼저가 아니라 직접 확연하게 몸으로 깨치는 과정을 통해서 사유체험에 이르렀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효의 ‘각’은 ‘몸각’에 다름 아닐 터이다. 박태원 선생은 무엇보다 중요한 이 마음의 구성과 몸각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책의 구성에서 맨 앞머리에 “존재의 고향 : 하나가 된 마음(一心)”을 배치하고 있다. 일심은 석도의 일획(一劃)이고, 다시 원효의 일각(一覺)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뿌리이자 고갱이다. 첫 장의 속표지에는 일심에 대한 전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대승의 진리에는 오직 ‘하나가 된 마음’이 있을 뿐이며, ‘하나가 된 마음’ 이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 단지 무명이 ‘하나가 된 마음’을 미혹시켜 파도를 일으키어 온갖 세상에 흘러 다니게 한다. 하지만 윤회하는 세상의 파도를 일으킬지라도 ‘하나가 된 마음’의 바다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된 마음, 즉 일심(一心)의 이치는 시각(始覺 : 존재 오염과 왜곡의 길에서 내려와 존재의 온전한 지평으로 돌아가는 깨달음의 여정), 일각(一覺 : ‘비로소 깨달아가는’ 길을 걸어 마침내 존재의 본래적 완전성을 구현하게 된 경지), 일미(一味 : 화쟁하는 국면) 등으로 서로 뇌들보를 건너면서 깨달음의 빛이 된다. 원효는 그 모든 이치의 카오스에서 화쟁(和諍 : 소모적인 배타적 언어 다툼의 치유)이라는 원리를 세운다. 그가 세운 화쟁의 원리는 주지하듯 표류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사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제1장을 읽고 나면 2장에서 10장으로 이어지는 글들은 밑줄 없이도 줄줄 읽힌다. 그리고 10장의 주제어인 “세상과 둘 아니게 만나기”에서 원효의 삶과 철학이 구닥다리 같은 옛 것이 아니라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생철학임을 생생하게 후체험하게 된다. 그렇다. 삶의 모든 것은 한 번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글_김종길(미술평론가, 경기문화재단 정책기획팀장)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박태원 저, 한길사, 2012)
<목차>
원효와 만나는 길 하나
원효는 어떤 사상가인가
1 존재의 고향
2 인간은 양면적 존재
3 존재 희망의 근거
4 존재 희망의 구현
5 언어의 다툼(諍論)과 치유(和諍) Ⅰ
6 언어의 다툼(諍論)과 치유(和諍) Ⅱ
7 효의 선(禪) 사상 Ⅰ
8 효의 선(禪) 사상 Ⅱ
9 둘로 나누지 말라
10 세상과 둘 아니게 만나기
주註
원효를 알기 위해 더 읽어야 할 문헌
원효를 이해하기 위한 용어 해설
원효에 대해 묻고 답하기
원효에 대한 증언록
원효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