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서재
『레가토』(권여선 저, 창비, 2012)
복기(復棋)하는 청년시대
프로이트는 인간이 지탱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강도 높은 체험을 ‘트라우마’라 부르면서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을 집요하게 장악하고 내부로부터 파괴시킨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말은 마치 권여선의 소설과 그 인물들을 위한 것인 양 보인다. 그녀의 소설은 트라우마가 단순히 감정생활의 위기가 아니라 조용하게 때로는 과격한 방식으로 침범해오는 기억의 소환임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녀만큼 기억이 병리성의 증거라기보다 성숙과 화해를 위한 절박하면서도 의지적인 희구임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근작 『레가토』이다.
권여선의 소설은 90년대 이후 한국 진보주의 문학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은 ‘후일담’에 속한다. ‘후일담’은 80년대의 변혁운동이 좌절된 후 수치심에 시달리는 혁명세대들의 일상과 내면을 그린 일련의 소설을 가리킨다. 그것은 순결했던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에 현실과 불화하는 인물들의 정서적 보상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권여선의 후일담은 살벌하지만 아름다웠던 추억과 더럽혀지지 않은 자기를 기억하기 위한 회고가 아니다. 마치 망각이 불가능하다는 듯 아물지 않은 상처 혹은 절단면을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는 훼손된 여성의 몸을 등장시킴으로써 불편한 진실과 대면시키고 우리 삶의 취약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윤리적, 정치적 삶을 재사유하도록 촉구한다.
모욕의 인간학
『레카토』의 줄거리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주인공 오정연은 유신정권 말기에 대학에 입학해 이념 써클인 ‘전통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중 조직의 선배인 박인하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폭력의 결과로 임신을 하자 대학 1학년을 마치지 못한 채 어머니 유보살이 있는 전남의 성암사에서 딸 하연을 낳는다. 그리고 서울에 가려고 나선 길에서 5월 항쟁에 열기에 휩싸여 시위에 참여했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은 후 실종된다. 소설은 그녀의 행로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전통연구회 멤버들이 그녀의 딸 하연의 방문을 계기로 시간을 거슬러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는 구도를 취한다. 이야기는 오정연이 파리에서 국적, 이름, 모국어 등 자기 정체성의 근거들을 망각해버려 백치 아닌 백치로, 불구의 몸으로 친구들에게 발견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권여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쉽게 “메워질 수 없는 모멸과 모욕의 골이 패어 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환기시킴으로써 ‘모욕’을 문학의 주요한 주제로 등장시킨다. 인간의 내면에 흉포한 짐승처럼 타자를 향하는 적의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폭력으로 현상한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도사린 적의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즉, 모욕을 정지시키지 않는다면 폭력 없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라우마는 인간이 쉬이 상처 입을 가능성이 있는 약한 존재이면서도 인간의 내부에 도사린 악의 가능성을 직면하게 만드는 계기로 초점화 된다. 이러한 성찰은 지독히 비감(悲感)한 것이지만 권여선은 독자를 어떤 대안도 없는 비관적인 질문의 수렁에 내던지지 않는다.
이 소설은 저항적 코뮤니티와,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국민의 순응을 강요하는 ‘네이션’ 모두로부터 훼손된 여성의 몸의 기억을 통해 폭력 없는 공동체에 대한 꿈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트라우마의 가해자가 상처 없는 승리자는 아니며, 재난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피해자와 연루되거나 또한 그것을 간접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적 증상에 시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트라우마가 공동체를 재구축할 공통감각 혹은 ‘공통성(the common)’의 기초임을 암시한다. 상실과 그것이 준 충격을 쉬이 비워내지 못하고 애도하려는 인간의 기억의 습관과 타자를 모욕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처벌을 바라는 이들을 통해 윤리적 주체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화려한 이력의 투사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마음을 나눌 수 없게 만드는 견고한 자폐의 벽” 속에서 유폐된 채 자신의 저지른 죄를 폭로하고 스스로를 처벌하고자 하는 박인하의 형상화는 생생하다. 그는 가해자가 상처 없는 승리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삼십년도 더 지난 시간의 저편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벌거벗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싸구려 휴지로 아랫도리를 닦”던 오정연이 플래시백처럼 귀환해 와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전통연구회 멤버들 역시 내상을 입었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그녀가 술자리에서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사라진 후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살아서는 그녀를 비워낼 수 없는 영원의 기억으로 안게 된다.
이들이 보여주는 눈물, 히스테리, 자학 등은 이들이 오정연을 잃고 그녀를 적절히 애도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렇듯 이들이 보여주는 우울증적 징후들은 이들이 상실을 온전히 애도하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즉 성공적으로 치유될 필요가 있는 불건강함의 징후나 실패의 증거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우리가 떠나보낸 자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고 리비도(Libido)를 새로운 대상에 재투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도 작업의 실패로 감정적 애착이 단절되지 못할 경우, 치료를 필요로 하는 병리적인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애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애도의 성공은 떠나간 사람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비정’이기 때문이다. 슬픔과 고통 등 인간의 취약성, 감수성, 의존성을 체험하게 만드는 정서들은 너무 빨리 해소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윤리적 주체 형성의 자원이 된다.
여성의 훼손된 몸과 한 몸 공동체에 대한 비판
왕은철에 따르면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편안하게 자연에 눕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몸이 있음이 삶이고 몸이 없음은 죽음이기에, 사랑했던 사람의 몸을 고이 묻어주고 묘비를 세워주는 장례의 절차가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 몸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만든다. 몸에 비해 이성의 우위를 주장한 근대철학과 달리 몸은 의식보다 우리들의 주체성에 더 깊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 의하면 몸으로 인해 우리는 행위주체가 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어떤 것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우리의 몸은 늘 우리 자신에게 속해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타자들의 세계에 배당되어 있기 때문에 늘 기습적인 폭력의 희생물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타인의 몸이 쉽게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폭력 없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듯이 인생을 갓 시작하려는 오정연은 자신이 누구보다 친밀하게 여기던 조직의 박인하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79년의 봄날 산골처녀인 오정연은 주근깨를 빛내며 피쎄일(유인물 배포)에 나서고, ‘전통연구회’의 박인하에게 존경인지 연모인지 모를 눈빛을 던진다. 그녀는 경찰과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정치권력에 대한 공포에 전율할 만큼 겁 많은 신참이지만 전통연구회를 탈퇴하지 않은 것은 그곳이 대통령을 ‘오까모또’라는 은어로 부르는 정치적 자유의 장일 뿐 아니라 밥과 술을 나누는 우정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정에 대한 기대는 폭력으로 훼손된다. 성폭력은 단순히 “살이 뜯어지는” “조잡하고 사실적인 고통”을 넘어 오정연의 정신적 삶에 치명적인 외상을 입힌다.
버틀러에 따르면 폭력 없는 공동체는 자신과 연결된 타자의 취약성에 대한 존중으로 전환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진정한 환대는 그 몸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이 무시됨으로써 타자의 소외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부장적 공동체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중심적 문화에 의해 관능적 욕망이나 모성적 위로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의 주체성을 부인 혹은 박탈하는 계기로 악용되곤 한다. 박인하네들은 이념 써클인 이념연구회, 전통연구회, 문학연구회를 “이년, 저년, 무년”으로, 조준환을 ‘좆운환’으로 호명하는 식으로 ‘몸’과 ‘성’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그간 몸의 삶에 충실하고, 비천한 ‘몸’으로 규정되어 온 여성들이 언제든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이 오정현의 행방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는 것은 동질성과 내재성을 요구하는 공동체가 그것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평등하기보다 위계화 되어 있고, 이익을 나누어갔다는 점에서 패거리주의와도 유사해, 기실 여러 갈등에도 불구하고 연대의식이 뛰어나다. 국회의원 보좌관인 조준환을 비롯해, 정치인의 자서전을 출판해 먹고 사는 준태나 광고사 피디 용호 역시 생존의 유리한 자원으로서 국회의원 박인하와 서로 간의 친분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공동체가 사실상 실제와 달리 미화된 이름임을 암시한다. 이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군부독재를 부정하며 사회혁명을 꿈꾸었지만 집단주의적이며 군사주의적인 동원문화,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문화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문화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여성적 도덕성과 환대의 식탁
이 소설은 앞서도 말했듯이 남성작가의 후일담과는 매우 다른데, 특히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주인공이 이념적 각성과 시위 체험을 통해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전사로 성장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래도록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는 대통령을 ‘오까모또’라 조롱하며, 합숙 훈련기간 일본에서 번역된 맑시즘 서적을 읽는 ‘불온’한 이념 써클이지만, 스무 살 치기어린 주고받은 농담과 유머나 합숙을 하거나 농활에 가서 먹었던 음식에 관한 것 등 이념공동체라 부르기 무색할 정도로 피부와 살로 체감된 기억들이 오정연의 이야기에 담겨 있다. 먹는다는 것은 환대, 즉 사랑과 우정의 가장 탁월한 표현으로 재해석된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한 후 공포와 충격 속에서도 박인하에게 김밥을 사다준다. 그가 구토를 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여성의 정체성을 모성성에 두고 제도화된 여성성을 수락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먹는 입이 있고, 그것을 존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공동체들이 가졌던 기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을 증명하듯 박인하는 성폭행당한 그녀가 사다준 “낡고 보드라운 속옷 같고, 닳고 구겨진 책받침 같고, 심심한 국 같고,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나는” “괴상한 통김밥”(pp.79-80)을 기억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친구들 역시 임신한지도 모른 채 닭날개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그녀가 낯설어 면박을 주었던 일을 떠올리며 자책한다.
그간 공동체의 이상적 조건이 되어온 우정(Philia)는 남성교양의 자질로 인지되면서 육체성을 잃고 지나치게 이념화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페미니스트들은 우정의 본성을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온 여성들의 체화된 감각에서 찾는다. 이념 같은 추상적 가치보다 인간의 먹는 입을 존중해온 여성들이야말로 국경, 이념, 성, 계급을 중심으로 포식자와 피식자가 갈리는 불평등한 세상을 넘어설 대안적 주체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암사는 여성적 도덕성에 기초한 유토피아적 대안 세계인 양 여겨진다. 성암사는 법과 이념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환대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젊은 날 빨치산 게릴라 투쟁에서 내상을 입은 오정연의 아버지와 한국전쟁 중 고아가 된 유보살 그리고 장애를 지녀 시집에서 쫓겨난 권씨 여인이 이념과 전쟁 그리고 가부장적 가족제도로부터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장소이다. 특히 성암사의 나이든 두 여자는 여성의 몸을 극진히 존중해 미혼의 임부인 정연은 지극한 보살핌 속에 섭생을 하고 건강한 딸을 낳는다. 두 여자의 음식은 오정연의 훼손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치유제로 기능한다.
작가는 국경, 세대, 성 등 차별의 표지들을 넘어 취약한 조건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의 고독과 슬픔을 주시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간 사이에 도사린 적대를 허물고 화해의 자리를 시도하려는 듯 환대의 식탁을 마련한다. 파리의 한 식당에서 아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오정연과 한국인 유학생 그리고 우연히 파리를 방문한 오정연의 친구들이 만찬을 함께 한다. 이 자리에서 오정연은 백치인 양 모든 기억을 잊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연이라는 이름에 반응하고, 유학생인 석빈은 오정연이 외마디 비명처럼 토해내는 하연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여자 친구의 것임을 알아차린다. 광주에서 총상을 입은 오정연을 구해낸 에르베 교수는 사촌 여동생 아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녀를 자신의 누이인 양 보살핀다. 인간 각자가 지닌 고독과 슬픔을 나누고 화해와 치유를 모색하는 이 자리는 슬프고도 아름답다.
글_김은하(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레가토』 (권여선 저, 창비, 2012)
<목차>
1. 프롤로그: 푸른 연회
2. 서랍이 열리다
3. 섬의 흔적
4. 보헤미안 랩소디
5. 춤추는 우연
6. 진흙의 시간
7. 가면 겨울숲
8. 꽃 핀 오월의 목장
9. 거울 속 벽화
10. 에필로그: 강변 파티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