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by [가난②] 가난을 돕는 방법, ‘국제 원조’의 이면

글작성자 신청일 Sep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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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너머>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이야기 중 한 가지 주제를 선정, 책과 함께 읽어 내려갑니다.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 한켠에 묻어두었던 고민일수도 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전혀 관심 없던 주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통해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접근해보는 것은 어떠세요? 따라 읽어나가다 보면 그 너머의 생각들을 길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편집자주)


[가난]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

담비사 모요죽은 원조(김진경 옮김, 알마, 2012)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분명 선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 그것은 인간의 의무이며 가장 확실한 인류애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빈곤퇴치를 위한 원조는 유엔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에서, 잘사는 나라의 시민사회에서, 그리고 IMF와 세계은행에서도, 확고한 공통의 글로벌 의제로 언제나 가장 우선순위에 놓여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니. 이런 현상은 인류의 휴머니즘이 점점 확산되어왔다는 증거일까요?


그런데 여기 한 경제학자가 원조를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원조를 받고 있는 아프리카의 경제학자입니다. 담비사 모요. 잠비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다시 잠비아로 돌아가 아프리카 사람들의 입장에서 원조의 경제학을 의심해보기 시작한 사람. 그의 질문은 제가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의문과 비슷합니다. 온 세계의 선량한 사람들이 이토록 돕고 있는데도 왜 아프리카는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놀랍게도 그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죽음을 부르는 원조를 중단하라!’.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처음 받아온 저금통이 생각납니다. 빵모양의 작은 저금통에는 제 또래의 아프리카 소년의 사진이 붙어있었지요. 앙상하게 마른 얼굴에 퀭한 눈, 그리고 그 눈빛을 번역해 놓은 것 같은 글귀 도와주세요가 함께 쓰여진 사진이었습니다. 아들 녀석은 연말이 되면 이 저금통에 모은 동전을 먼 나라의 가난하고 배고픈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 돈은 국제 NGO단체를 통해 저금통에 그려진 아프리카 소년에게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년은 빵도 사고 우유도 사고 연필도 책도 사고 학교도 다닐 수 있겠지요. 대부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만약 한국 정부가 다른 가난한 나라에 국제적 원조를 한다고 하면 한국도 과거 잘사는 나라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이제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조에 지지하는 것이 성숙한 세계시민적 태도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제가 일했던 대학의 연구소를 비롯하여 많은 국내 연구기관들은 몇 해 전부터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라고 불리는 정부 차원의 국제개발원조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상당히 많이 수행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경제발전을 돕기 위해 한국이 할 수 있는 증여 차관 기술원조 등 다양한 형태의 원조를 제공하는 방식을 설계하거나 그 효과를 예측하고 검증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은 아프리카를 포함한 전 세계의 빈곤국들에 대해 ODA 원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뿌듯할 만큼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도 열심히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그 노력이 오히려 죽음을 불러왔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오늘 당신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가난을 돕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반세기 동안 천문학적인 액수의 원조금이 흘러들어간 아프리카는 왜 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가? 담비사 모요의 죽은 원조는 바로 그러한 의문을 풀어간 책입니다. 그의 연구는 원조의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를 실증적으로 밝혀내서 우리에게 그 비밀을 하나씩 알려줍니다.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아프리카의 비참한 현실이 외부세계에 알려지고 국제사회의 양심 있는 시민들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운동을 시작한다. 정부와 국제기구들도 이 도덕적 호소를 외면할 수 없어 빈곤국들에 대한 국제적 연대의 일종으로서 원조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공유하는 이 시나리오는 그러나 일면의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잘사는 나라들의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 대한 원조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국제정치경제학의 배경이 있습니다.


2차 대전 후 서구자본주의 경제는 재건에 성공합니다. 당시 미국은 마셜플랜을 통해 미국은 엄청난 자금을 원조하여 유럽의 재건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일방적인 원조는 아니었습니다. 유럽 재건 사업을 통해 미국경제 역시 공황의 위기에서 벗어나 급발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마셜플랜의 성공을 통해 서구의 자본은 투자자본이 경제성장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인식과 경험을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차관 형식으로 유럽에 자금을 제공하자 세계은행과 IMF는 유럽구제라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전후 유럽 재건을 위해 배정한 자금은 새로운 개발의제에 쓰일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곧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냅니다. 아프리카! 그곳에는 원조를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있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다수의 인구, 저임금 노동, 미비한 공공기반시설, 개발을 위해 필요한 금융자본의 절대적 부족,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서구의 엘리트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해외원조는 더 많은 투자를 유발시켜 더 큰 경제성장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정부와 시민사회를 설득합니다. 기업들이 직접 투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국가가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방식의 차관공여를 통한 원조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의 제국과 식민지는 채권국과 채무국의 관계로 전환됩니다. 원조는 결코 거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가 과거 식민지들에 대해 저지른 수탈과 착취에 대한 반성도, 배상도, 순수한 인도주의적 지원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원조경제는 서구경제의 활로였던 것입니다. 서구의 자본이 아프리카에 투자한 것, 그것이 원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조경제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지배적 산업인 금융산업과 부채경제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원조경제는 수여국보다 공여국에게 더 남는 장사이기도 했습니다. 서구사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받을 수 없는 돈을 퍼붓기만 했다고 엄살을 부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사실상 서류상의 독립이었을 뿐 현실은 과거 식민지 시절의 주인 국가들로부터 받은 금융지원에 의존한 독립이었습니다. 서구의 국가들에게 금융원조는 이 독립국들을 계속해서 자기 나라의 지정학적 영향력 하에 두고 원조에 대한 조건과 담보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반면 아프리카의 입장에서는 감당할 수 없이 밀려들어 오는 원조가 오히려 거대한 저주였습니다.


·소 냉전기에 미국은 원조를 냉전의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서방세계는 경제적 동맹과 해외영토를 통해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원조가 세계를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만들기 위한 경쟁에서 또 하나의 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독재정권과 전쟁광 군부에게도 아낌없이 돈을 퍼부어주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그리고 그 원조금을 둘러싸고, 아프리카의 각지에서는 내전이 끊이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서구의 총칼이 아프리카를 짓밟았다면 이번에는 서방세계의 돈이 아프리카를 철저히 파괴합니다. 무력에 의한 예속이 돈에 예속된 상태로 변질되었을 뿐, 예속상태는 변함이 없습니다. 서구의 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정부, 자립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으니까요.


책에는 가난(빈곤)’이 국제원조의 중심의제가 된 현실적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서구 시민사회에 싹트기 시작했다는 식의 설명과는 전혀 다릅니다. 70년대까지의 서구의 원조정책은 돈 빌려 드립니다‘(그 돈으로) 건설해드립니다로 상징됩니다. 그런데 유가상승으로 인해 원자재 가격이 오르자 국제사회(서방세계)는 개발의제를 빈곤퇴치로 전환합니다. 이전까지의 원조가 실질적인 투자, 즉 대규모 공공기반시설 투자(전기, 운송 등)에 집중되었다면, ‘경제적인 이유에서빈곤퇴치(문맹퇴치캠페인이나 예방접종프로그램 식량보급 등)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경우 1970년대 중반까지 원조의 거의 2/3가 도로, 철도, 상하수도, 항만, 공항, 발전소, 통신 같은 공공기반 시설에 쓰였지만, 1980년대 초반이 되면 빈곤구제 원조가 50%에 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조의 중심의제가 빈곤의제로 바뀌게 된 것은 아프리카의 경제 상황에서는 더 안 좋은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경제의 자립적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인 공공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중단되고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물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원조의존 경제시스템이 시작된 것이니까요.


더 기만적인 것은 원조경제의 혜택이 수여국보다 공여국에 돌아갈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책 장 베르트낭 아리스티드의 가난한 휴머니즘에는 1980년대 아이티의 토종돼지들이 전멸했던 일화가 나옵니다. 보면 원조가 어떻게 공여국에 더 많은 이익을 돌려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작고 검은 크리올 돼지는 아이티 농촌 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아이티 기후와 조건에 잘 적응한 돼지였습니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 찌꺼기를 먹을 뿐 아니라 음식 없이도 사흘은 지낼 수 있었습니다. 시골가구의 80~85퍼센트는 돼지를 기르는데, 돼지를 기르는 것은 토양을 비옥하게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농민의 개인 저축은행 노릇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돼지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나 경사가 있을 때 학비를 마련해야할 때 팔아서 요긴하게 썼습니다. 1982년 국제기구는 개발프로젝트를 통해 아이티 토종돼지들을 살처분하고 대신 더 나은 돼지를 들여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고도의 효율성으로’ 13개월 동안 크리올 돼지들은 모두 도살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새 돼지들이 들어왔는데, 그 돼지들은 워낙 훌륭한지라 아이티 인구의 80퍼센트가 식수난에 처해 있는데도 깨끗한 물을 먹게 해야 했고, 당시 아이티의 1인당 국민소득이 130달러인 상태에서 90달러나 하는 수입사료를 먹여야 하는데다가 덮개가 있는 돼지우리까지 있어야 했습니다. 아이티 농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돼지들에게 네발 달린 왕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공여국들은 원조금을 줄 때 그냥 주지는 않습니다. 원조금에는 이자 외에도 항상 조건이 따라 붙습니다. 아이티에 새로운 축산업 육성을 위한 원조금을 빌려줄 때도 마찬가지였죠. 국제기구는 돈을 빌려주면서 그 돈으로 토종돼지를 박멸하고 미국산 돼지를 살 것을 조건에 답니다. 아이티의 농부들은 저리에 축산장려금을 빌려 그 돈으로 아이티 돼지를 죽이고, 미국산 돼지를 사고, 그 돼지를 위한 축사를 짓고, 축사를 짓는 건설회사에 비용을 지불하고, 미국산 사료를 사서 먹입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원조의 경제가 너무나 이상한 셈법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조프로그램은 과연 아이티의 농부들을 도운 것이었나요? 아리스티드의 다음과 같은 항의 속에는 모든 원조 받는 나라 농부들의 절규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1달러당 84센트가 원조를 제공한 나라에 다시 돌아간다면, 이 나라의 농민과 물을 위해 쓸 돈은 도대체 몇 푼이 남는 셈입니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요, 회수할 수 없는 투자라고 하면서도 서구 정부들이 빈곤국들에 대한 원조를 계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테니 그 돈으로 가게를 열고 내 물건을 사시오, 그 돈으로 운송비와 인건비도 나한테 줘야 하오, 그리고 사업을 계속하려면 물건은 계속 나한테서 공급받아야 할 거요, 그리고 빌려준 돈도 갚으시오, 기한 내에 돈을 못 갚으면 대신 다른 담보물을 주시오, 당신 앞마당의 광물을 파갈 수 있는 채굴권이라든가, 상하수도 시설 독점권이라든가, 아 그걸 할 돈이 없다고? 걱정 마시오, 그 돈은 얼마든지 빌려줄테니.” 당신을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놈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조경제가 만들어내는 것은 무한 착취, 무한 수탈, 무한 예속의 순환고리일 뿐입니다.


서구가 원조를 계속 제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1만여 명의 직원이 있고, IMF2,500여 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유엔기구들에서 일하는 직원 5,000명을 더하고, 최소 25,000개의 등록된 NGO, 민간 자선단체와 정부의 원조기구 직원들까지 더하면 50만 명가량 됩니다. 이들은 10, 아니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원조 사업에 몸담고 있을 것입니다. 원조를 제공받는 관리들의 생계가 그런 것처럼 원조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생계도 원조에 달려있으니까요. 공여국들은 돈을 퍼주지 않으면 빈곤국들이 빚을 되갚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공여국들의 재정 상태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또 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순환논리가 바로 원조라는 회전목마가 계속해서 활기차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원조경제는 결국 두 집단을 먹여 살리는데, 공여국의 엘리트와 수여국의 엘리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원조금 대부분은 결국 다시 서구 기업의 주머니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원조기구의 운영비와 인건비로 쓰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원조의 메커니즘은 피터 바우어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서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기업을 원조하고 엘리트 계층을 원조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돕고 있는가요? 이 역설적 결론 앞에서 아마 당신은 당황하고 있겠지요. 어쩌면 불쾌할지도 모릅니다. 당장 그동안 아프리카에 보내던 얼마간의 기부약정을 취소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요한 것은 책 뒤표지에 쓰여 있는 글귀처럼 진심으로 그들을 돕고 싶다면 단순히 양심을 달래는 것 이상으로 뭔가를 해야 하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아프리카 경제학자는 원조의 수렁에서 탈피하여 자립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방법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원조의존의 최종적 결과는 제대로 돌아가는 아프리카를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아프리카 사람들이 운영하는 게 아니라 외부인들이 아프리카의 운명을 결정하고 지배하려고 기를 쓰는 결과만 가져온다. 아프리카 문제가 글로벌 의제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프리카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며 서구의 팝스타와 정치인들이 아프리카 담론을 독식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손에 선발된 아프리카 사람들이 국제무대에서 발언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아프리카를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아프리카 사람들이 운영하도록 하라는 외침은 가난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해결하도록 하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빈곤 담론을 가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다시 만들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착취를 투자라 생각하고 파괴를 개발이라 수탈을 원조라 여기며 이런 식의 새로운 식민주의를 국제연대라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제 이 거꾸로 뒤집힌 말을 원래대로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의 잘 사는 나라들과 잘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의 어깨 위에 얹혀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가 깨닫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가난의 정치학을 고민하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난을 돈으로 돕는 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남아 있던 인간애마저 파괴한다는 것은 단지 국제정치적 상황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국내의 지역개발의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절대 들어설 수 없는 위험한 시설물들을 가난한 동네에 지으면서 사람들을 돈으로 유혹하는 방식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핵폐기물 처리장, 쓰레기 매립지, 하수처리장, 고압송전로를 엄청난 돈과 함께 들이 밀면서, 그것이 지역경제개발을 위한 호재라고 말합니다. 그 돈을 놓고서 주민 간에 갈등과 반목이 생기고 가난해도 단란했던 동네 이웃들이 적이 되고 맙니다. 신도시 개발도 마찬가지여서, 개발이 추진되고 토지에 대한 집단 수용이 시작되면 과거의 강제철거 대신 지금은 돈을 풉니다.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찢어놓고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이는 서방세계가 아프리카에 대해 했던 원조개발정책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해도,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치루고 있는 마음의 내전도 그보다 가혹하지 않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돈으로 도움을 주는 것, 거저 주는 것도 아니고 빌려주면서, 가난하나 순박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돈으로 갈갈이 찢어 서로 싸우게 만들고 결국은 가난에 스며있던 인간애까지 파괴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런 현실은 보지 않은 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자기 양심의 알리바이까지 지켜온 어떤 선량한 시민사회(good society)’가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회를, 그런 시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지난 주, 어떤 강의에서 만난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북유럽은 내부적으로는 매우 좋은 사회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요? 제가 본 그 나라들에는 가난한 동네가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하지만 저는 가난한 동네와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가난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을 얼마나 멀리 쫒아냈는지를.


_채효정(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강사,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


죽은원조.jpg


[가난] 우리의 인간성을 파괴한 것은 가난입니까, 풍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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