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배움터>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관련 책을 읽으면서, 강의 등을 통해 우리는 많은 교육학자, 그들의 사상, 철학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저 막연히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교육학자나 이론, 철학적 배경을 모른다고 큰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앎이 없으면, 스스로의 학습이 없으면 쉽게 한계에 부딪힙니다. 이번 호는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 마지막 편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 등 제도화된 것들을 비판하고 소박한 자율의 삶을 추구했던 이반 일리치가 생각하고 쓰고 주장했던 것 중 교육과 배움에 대한 이야기. 그의 삶과 철학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편집자주) |
생각하고 배우며,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하며, 큰 욕심 없이 자급자족하면서 살다가, 병이 들면 스스로 치유하다 집에서 조용히 혼자 죽는 소박한 자율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 그렇게 살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처럼 자연에 따라 소박한 자율의 능력을 자유롭게 펴고 자치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더 인간답게 행복해질 수 있는데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가?
타율의 삶을 사는 사람들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박한 자율의 삶을 살지 못하고 사치스럽고 거대하며 편리한 타율의 삶에 미쳐 있다. 이름부터 거대한 대한민국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극소수의 소박한 자율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왕따를 당하는, 획일적인 국가주의-전체주의, 물질주의-산업주의, 거대주의-집단주의, 편리주의-표준주의, 일등주의-로또주의 등에 젖은 대한민국에서 특히 그렇다. 정치적 파시즘만이 아니라 경제-생활-사회적 파시즘이, 아니 정신적 파시즘이 더욱 심각한 대한민국에서 특히 그렇다. 심지어 반사회적 인간으로 취급되거나 표준과 획일을 강요하는 각종 사상규제법에 의해 범죄자가 되어 사회에서 매장되기도 하는 대한민국에서 더욱 그렇다.
문제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자유주의냐 공산주의냐, 제국주의냐 민족주의냐, 개인주의냐 집단주의냐, 근대주의냐 반근대주의냐, 농업주의냐 공업주의냐, 서양의학이냐 한방의약이냐, 생태주의냐 반생태주의냐, 딥 에콜로지냐 뉴에이지냐, 기독교냐 불교냐, 인문학이냐 실용학이냐, 교양이냐 전공이냐 따위의 각종 보수 진보 이데올로기나 특정 종교나 학문, 교육방법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그 대부분은 외재적인 것에 대한 비판이다. 반면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일상생활의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가령 학교교육 제도에 문제가 많다는 비판은 허다했으나 학교라는 제도 그 자체를 의심하고 공부란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병원 치료 제도에 문제가 많다는 비판은 많았으나 병원이라는 제도 그 자체를 의심하고 병은 스스로 치료하는 것이고 죽음은 집에서 조용히 맞는 것이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 모든 관념이나 제도를 회의하고 단념하여 본래의 소박한 자율의 삶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 스스로 느끼고 사랑하며, 생각하고 배우며,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하며, 큰 욕심 없이 자급자족하면서 살다가, 병이 들면 스스로 치유하며 집에서 조용히 혼자 죽는 소박한 자율의 삶을 사는 길이다. 그러나 이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적 법과 정치, 산업주의적 경제와 사회, 획일주의적 문화와 정신이 있는 곳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한다. 그런 싸움을 외면하고 시골 농사를 찬양하는 일은 반상의 계급사회를 외면하고 무계급의 자연을 노래한 조선시대 선비들보다 더 위선적이고 허위적인 짓이다.
희망의 존재로 인간을 사랑한 에피메테우스
소박한 자율의 삶이 옳다고 주장하고 우리 모두 그렇게 살자고 권유한 일리치가 평생 이상으로 삼은 인간상은 『학교 없는 사회』 마지막 7장에서 말한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상’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피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으로서 모든 것을 주는 여신 판도라와 결혼하는데,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에피메테우스의 딸 퓌라가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고 한다. 즉 퓌라가 던진 돌에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일리치 역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고대했다. 『학교 없는 사회』에서 그는 종래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고 해서 찬양된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에피메테우스를 찬양했다.
에피메테우스는 인간의 본성과 인격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희망의 존재로 재물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다. 그에 반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은 희망이 아니라 기대하는 존재로 인간보다 재물을 사랑하고 제도에 기대하는 존재다.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은 과학, 기계, 전자계산기, 컴퓨터에 의존한다. 일리치가 희망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존의 생활양식을 극복하고 진실한 인간의 욕구와 본성에 더욱 깊이 감동할 줄 아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창조함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주는 판도라는 원래 유사 이전의 모권제 그리스의 대지모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항아리에서 모든 악이 도망가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희망이 도망가기 전에 뚜껑을 닫았다. 현대인의 역사는 판도라 신화의 타락에서 시작하여 스스로 뚜껑을 닫는 상자로 끝난다. 그것은 만연된 악을 하나하나 가두기 위한 제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역사다. 그것은 희망이 쇠퇴하고 기대가 증대해가는 역사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희망과 기대 사이의 구별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 적극적 의미에서 희망이란 자연의 선을 신뢰하는 것임에 반해, 기대란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통제된 결과에 의존함을 뜻한다. 희망이란 우리가 선물받기를 기대하는 상대에 대해 바람을 갖는 것이나, 기대란 우리가 자신의 권리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예측 가능한 과정에서 오는 만족을 즐겁게 기다리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적 에토스는 지금 희망을 침식하고 있다. 인류의 생존은 희망을 하나의 사회적 힘으로 재발견하는 데 달려있다.
원시인은 희망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는 자연의 풍요한 자비와 신의 은총, 그리고 그를 생존하게 하는 종족의 본능에 의존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희망을 기대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들에 의해 각색된 판도라는 악과 함께 선도 해방했다. 그들은 그녀를 주로 그녀가 해방시킨 불행으로 기억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것을 주는 모신이 동시에 희망도 가졌음을 망각한 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에게 판도라를 내버려두라고 했으나 에피메테우스는 그녀와 결혼했다. 고전기 그리스에서 에피메테우스란 이름은 ‘나중에 생각한다’는 뜻이었는데 이는 ‘우둔’이나 ‘바보’로 해석됐다. 그리스 사람들은 최초의 여성이라는 생각을 두려워하는 도덕적이고 가부장적인 존재로 변해 합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를 세웠다. 그들은 만연한 악에 대항하고자 계획한 제도를 만들어냈다. 세계를 만드는 힘을 의식하게 됐고, 그들이 기대하도록 배운 서비스를 생산하는 세계를 만들었다. 그들의 요구나 그 자식들의 장래 수요가 그들의 인공물에 의해 형성되기를 바랐다. 그들은 입법가, 건축가, 작가, 그들의 자손들에게 모범이 되는 헌정과 도시 및 예술작품의 수립자가 됐다. 원시인은 개인을 신성한 의례에 신화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에 의존하여 사회의 관습을 가르쳤다. 그러나 고대그리스인들은 교육에 의해 앞 세대가 계획한 제도에 적응하는 사람만을 참된 인간으로 인정했다.
원시인들은 세계가 운명, 사실, 필연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프로메테우스는 사실을 문제로 바꾸고, 필연성을 의문으로 불렀으며, 운명에 도전했다. 고대인은 인간적 전망에 대한 시민적 맥락을 형성했다. 그는 운명으로 주어진 자연환경에 도전할 수는 있으나, 오로지 위험을 각오하는 경우에만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현대인은 그것을 더욱 추진하여, 자신의 이미지에 맞추어 세계를 만들고, 전면적으로 인공적인 환경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으며, 나아가 환경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지속적으로 개조한다는 조건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지금 우리는 인간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직시해야 한다.
경제인이라는 인간상의 이면
일리치가 말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인간인 ‘호모 에코노믹스’ 즉, 경제인이기도 하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와도 다른 인간이다. 일리치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난 상태에서는 사회적 능력이 없고, 교육을 받아야만 평생 사회적 능력을 갖는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서양 엘리트 계급의 새로운 공통인식이 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다. 이 근대적인 확신이 널리 퍼져 교육은 “인간의 생명 유지에 절대로 필요한 능력의 반전을 의미하게 됐다.”
17세기까지 서양에서도 데카르트나 베이컨이나 홉스가 말한 보편적 이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들 이후 보편적 이성에 근거한 교육이라는 것이 경제인의 육성을 목표로 삼아 시작됐다.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제 생산양식으로의 이행, 또는 일리치가 말하는 젠더에서 섹스로의 이행이었다. 일리치가 말하듯이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이미 그 전의 인쇄 발명과 함께 나타났으나 그 때는 아직도 종교적 우주관에 의해 지배됐다. 오로지 사리사욕에 지배돼 한도를 모르는 목적을 향해, 희소한 수단을 이성적으로 이용하는 행동을 최대화하는 경제인은, 평등이라는 이념이 세속적 상식이 되고 경제학의 시조들이 근대사회의 법칙으로 주장한 희소성이라는 가설이 사회의 지배적 원리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이러한 경제인이라는 인간상이 범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함에 따라, 일리치가 말하듯이 인간의 희망은 기대로 변하고, 풍부한 전통은 쓸모없는 것이 됐으며, 전통적인 지혜는 단지 후진적인 것으로 폄하되고, 자기 한계의 자각은 진취성의 결여와 무기력으로 비난됐으며, 검소함은 유용성의 최대화를 향한 경쟁능력의 결여로 무시됐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인이 중심인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성립된 국민국가는 국민에게 필요를 충족시키는 법적 권리를 부여하고 그러한 경제인의 육성을 위한 국민교육을 실시했다.
학교 없는 사회
그러나 이는 19세기에 와서 제국주의와 인류문명의 파탄을 초래했다. 학교교육 제도의 파탄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서양식 국가와 교육에 대항해 20세기 초 간디는 ‘새로운 교육’(Nai Talim)을 주장했다. 즉 경제 인간과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경제를 거부하고 고유한 지역사회의 자립과 자급을 강조한 ‘빵의 노동’이 갖는 풍요와 존엄의 교육이었다. 간디는 교실 교육을 거부하고 인도의 토착문화, 농업문화, 가내수공업의 전통을 지켰다. 그는 국가권력과 현대기술에 의한 천박한 전제정치와 관료적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세계은행이 출자한 댐건설에 대한 반대운동, 핵융합 시설에 대한 반대운동, 삼림 벌채에 대한 반대운동 등 간디를 잇는 민중의 투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일리치가 말한 현대교육제도의 문제점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반복해서 지적되어 왔으나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개선되고 있지 못하다. 청소년을 학교교육의 공포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서 학교 없는 사회가 한국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이루어지길 빈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서비스 제도에 의존하는 구조적 경향으로부터도 벗어나길 바란다. 이는 성장과 발전의 한계를 명백하게 설정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 한계가 없는 무한한 성장과 발전은 이미 우리가 보아온 대로 사회양극화, 물질적 오염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학교 철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글_박홍규(영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