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by [칼럼] 수미네와 일상의 민주주의

글작성자 신청일 Jun 02,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댓글로 가기 인쇄

수미네의 전신 수미사가 결성된 건 지난해 1117일이다. 화성행궁 앞에 지어지는 공공미술관의 이해 못할 이름을 바로잡자는 데 동의한 사람 몇이 찻집에 모인 게 계기다. 이름 하여 수원 시민미술관을 고민하는 사람들. 지역 문화예술인, 시민단체 활동가, 언론인, 연구원 등 우연히 연락 닿은 이들의 집합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시민의 결사?

회의랄 것도 없었다. 수원시장과 수원시가 왜 아파트 브랜드 이름을 미술관에 붙였을까를 겨끔내기로 추정하여 성토하다가 어쨌든 함께 반대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무슨 활동을 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는데, 실행 가능성과는 별개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이들 발언을 교통정리 하는 데만 2시간 이상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이보다 더 민주적일 수 있을까?

생업들이 바빠서 다음 모임 일정을 정하는 것도 힘들었다. 겨우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는 날을 택했다. 횡으로 종으로 연락해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로 했으나 다음 회의도, 그 다음 회의도 10명을 넘지 못했다. 회의 진행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2시간은 기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수미사는 일상의 민주주의 혹은 시민운동의 한 원형이 아니었나 싶다. “민주주의란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밝히고 나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데서 출발한다.”(파커 J. 파머) 수미사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화성행궁이라는 수원의 상징 장소 앞에 아파트 브랜드명 미술관을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짚은 서한을 시에 전달하고, 시의 입장에 귀 기울이기 위해 시장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시는 요령부득의 답변만 내놓았다. 시장 면담도 기약할 수 없다고 했다. 수미사로서는 수원시가 민주주의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참여행정을 제 1 기치로 내세우는 수원시의 이런 태도는 어느 모로 보나 민주적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소수의 시민이라 하더라도 타당성 있는 지적을 하면 시는 이에 성의껏 답하고 대화하는 게 참여자치 아니던가?


업체가 300억 원이나 내는 데 브랜드명 쯤 내주면 어때? 라는 의견이 분명 있을 수 있다. 수미네는 기업의 아름다운 뜻을 전혀 기리지 말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단지 수원 심장부의 공공미술관에 그런 이름은 붙이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는 점과 애초 불투명했던 명명과정을 바로잡아 이제라도 투명하게 시민 의견을 들어 정하자는 것이 전부다. 이게 억지 주장인가?

수미사가 강하게 톤을 높이자 2월 하순 시장 면담 일정이 잡혔다. 수미사의 특성상 협상대표란 있을 수 없다. 역시 설왕설래 끝에 다섯 사람을 선정했다. 대표들은 면담 전날 만나서 시장이 시민배심법정과 같은 공개적인 공론의 장을 펴 주기만 하면 더 이상 시와 맞설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300억인데 이름이 뭔들 어때?’라는 식의 의견에 맞서 우리의 견해를 충분히 밝히고, 시민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승복하는 것, 그게 민주주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은 시민배심법정으로 가기엔 너무 늦었다며 거절했다.


결국 수미사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했고, 올 들어 3월 하순에는 수미네(수원 공공미술관 이름 바로잡기 시민 네트워크)로 개편했다. 수미네는 문화예술단체, 시민단체, 시민들의 연대체를 표방했지만, 약간의 형식만 갖추었을 뿐 의사결정 방식 등에서는 본질적으로 수미사와 다를 바가 없다. 수미네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명명의 과정 등을 밝혀내기 위해 수원시에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10개 항목 중 제대로 답변이 돌아온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수미네는 목소리를 한 옥타브 더 올리기로 했다. 전국 조직인 문화연대와 함께 전국 문화예술단체, 문화예술인 서명에 돌입하고, 수원시와 수원시의회를 항의 방문했다. 결국 시의회 상임위 조례 통과를 이틀 앞둔 시점에서 시-시의회-수미네 3자 협의가 어렵사리 성사되었다. 하지만 시가 아파트 브랜드명을 약자로 가린 명칭을 대안으로 제시함으로써 협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세계적으로 아파트 브랜드명을 붙인 공공미술관이 없으므로 이름을 바꾸자는 시민단체에게 약자로 브랜드명을 눈가림한 명명이 통할 것이라고 정말 믿은 걸까?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조례는 514일 상임위를 통과했다. 이대로라면 21일 본회의 통과도 불을 보듯 뻔했다. 수미네는 517일 오후 2시부터 521일 오후 6시까지 <무한도전 100시간>을 펼치기로 했다. 행궁 광장에 캠프를 차리고 마지막까지 축제적 항의의 장을 펼쳐보자는 것이었다. 다양한 놀이와 토론과 거리강연을 100시간 꽉 채워 이어갔다.

시의회는 21일 본회의에서 명칭과 운영에 대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일부개정조례안을 상정하라는 단서를 붙여 조례 원안을 가결했다. 이 단서가 수미네가 지난 6개월 여 활동 끝에 얻어낸 최대의 성과다. 이 단서는 그 자체가 수미네의 주장에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는 증거다. 시의회 결정이 있던 날 저녁, 수미네 구성원들은 시민의 힘으로 미술관 이름이 확정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졌다.


수미네의 활동은 발언하는 시민, 행동하는 결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내부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한 운영 방식이나 철저하게 문화적 태도를 유지하려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모든 점이 매끄럽지는 않았다. 잡음도 있었고, 아름답지 못한 설전으로 큰 소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렇게 굴러가는 것 아니던가? 수미네의 활동이 훗날 정확하게 평가될 날이 있기를 바란다.

앞서서 행동하는 그룹은 저 아래로 가라앉았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다시 떠올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미네 역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공공시설의 명명권, 투명한 행정 절차의 중요성, 거버넌스의 결함, 자치제도의 허점, 패거리정치와 진영논리, 지역문화계의 어려움, 시민운동과 인권 등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억압되고 감추어졌던 문제들을 지역사회에 다시 던졌다. 이들 문제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지역 시민운동이 다시 붙들고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가야 할 화두들이다. 수미네가 기꺼이 떠맡은 일상의 민주주의 실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_양훈도(한벗지역사회연구소)

수강신청이나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여기를 클릭하셔서 회원가입 후 로그인을 하셔야 합니다.
회원가입 하신 분은 우측 상단에서 로그인을 하시면 수강신청 혹은 댓글을 다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