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너머>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이야기 중 한 가지 주제를 선정, 책과 함께 읽어 내려갑니다.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 한켠에 묻어두었던 고민일수도 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전혀 관심 없던 주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통해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접근해보는 것은 어떠세요? 따라 읽어나가다 보면 그 너머의 생각들을 길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편집자주) |
[감정적 삶]에 관한 세 번째 책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돌베개, 2010)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에는 이미 상당히 유명해진 장면이 등장한다. 은찬이 남장 여자인 것을 모르는 한결은 자꾸만 그(그녀)에게 쏠리는 자신의 마음과 눈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젠 상관 안 해. 가보자 갈 데까지”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혹과 불안 그리고 동성애자에 대한 세간의 차별적 시선이 두렵지만 판단을 정지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말은 파국을 피할 수 없다하더라도 사랑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다. 이 드라마는 사랑, 즉 감정이 순치되지 않은 영역이라고 설득한다. 사랑이 이성적 계획이나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원초적이고도 순수한 감정이라는 확신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뜨겁고 생생하기만한 감정에 굴복하며 개종에 버금갈만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라면 사랑은 신성한 숲에서 느낄법한 신비라는 믿음은 올드한 대중 드라마의 관습적 상상력이라고 할 것이다. 감정사회학이라는 생소한 학문 분야의 학자로서 그녀는 『감정 자본주의』(『Cold Intimacies』, 2007)를 통해 “감정은 사회 이전 문화 이전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문화 의미들과 사회관계들 바로 그것이다.”(p.15)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감정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아와 정체성을 제도화해왔다. 감정은 순치되지 않은 야생적 활기로 생동하기보다 이성적으로 그것을 적절히 관리 및 활용하는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내는 근대적 양식이고 구조이다. 특히 그녀는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은 감정문화가 형성된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감정 자본주의’라는 한국어 제목은 감정 담론들 및 실천들이 경제 담론들 및 실천들을 구성하고 경제 담론들 및 실천들이 감정 담론들 및 실천들을 구성하는 문화, 한편으로는 정서가 경제적 행위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변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생활-특히 중류계급의 감정생활-이 경제적 관계 및 경제적 교환의 논리를 따라가는 문화를 의미한다.
그녀는 이렇듯 새롭게 탄생한 근대적 주체의 이름을 ‘호모 센티멘탈리스(Homo Sentimentalis)’라고 칭한다. 감정 지능, 감정 능력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잘 읽고 활용할 수 있는 이가 사회적으로 성취하고 행복에 도달하는 감정 서열화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원초적이고 뜨거운 상태가 아니라 차갑게 관리 가공되어야 한다.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언제 어떠한 경로를 통해 탄생했는가? 그녀는 프로이트의 강연이 있었던 1909년을 미국인의 감정문화에 큰 변화가 발생한 기념비적인 해로 꼽는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다소 난해하고 반체제적으로 보이지만 개인의 감정생활을 재구성함으로써 20세기 미국문화를 지배해온 치료학적 감정양식을 생산해낸 문화적 계기이다. 그녀의 말처럼 인류는 프로이트로 인해 비로소 풍요로운 감정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러 심리적 징후들을 가족사적 비밀이나 리비도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발견과 해석을 기다리는 신비에 찬 암호로 만들고, 그의 스승이나 선배들과 달리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간의 장벽을 완화함으로써 ‘정상성’을 도달해야 할 목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에바 일루즈는 ‘공적 영역=이성=남성성’ ‘사적영역=감성=여성성’을 상호배타적으로 구분지어온 페미니즘의 도식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음 혹은 감정은 여성들의 전문영역으로 특화되지 않았다. 심리학은 교육, 범죄, 결혼, 경제, 군대 등만이 아니라 기업에서도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자본주의 황금기에 기업은 탐욕스러운 자본가가 빈곤한 노동자를 향해 전횡적 폭력을 행사하는 끔찍한 곳이 아니라 좀 더 부드러운 장소가 되었다. 심리학은 사회적 지위와 무관한 인성이 사회적, 경영적 성공의 열쇠라는 새로운 믿음을 주입하고, 권력관계였던 노동자-경영자 관계를 민주화했다. 이제 리더십은 태생적 특권과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인성과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되었다. 즉, 소통능력을 가진 경영자는 스스로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 성찰적 존재로서 공감 기술이나 감정 이입 기술의 계발을 과제로 삼는다. ‘소통’은 기업형 자아의 모델을 정의하는 특징이 되었다. 기업에서 심리학을 활용하기 시작하자 경영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비대결적인 방식으로 조직화되어 계급투쟁 등을 무력화하는 효과마저 발생했다.
이 책의 흥미로운 대목은 심리학이 단지 기업의 새로운 경영 기술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삶 속에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자신의 감정 관리에 능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문을 열어두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의 자기계발 이데올로기, 즉 미덕을 발휘하여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20세기의 심리학과 결합했다. 특히 자아를 실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보살핌과 치료학이 필요한 병리적인 상태에 놓은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자기계발은 테라피, 즉 각종의 요법과 접속한다. 그러므로 이제 민주주의는 정치적 구호가 울려 퍼지는 광장이 아니라 자기의 정신적 고통의 내러티브를 진술하는 심리상담소나 연예인이 자신이 겪은 공황장애의 고통과 극복기를 털어놓는 텔레비전 토크쇼 등에서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소 무미건조한 성공담 전기가 고통이 정체성의 구성요소가 되는 전기로 변이된 치료학적 자서전으로 진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각종 요법의 전문가를 많이 알고 그들과 빈번하게 접촉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자아를 실현해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된 듯 보인다. 실제로 많은 중산층들이 마치 유대인이 광야를 헤매며 신의 음성을 듣고자 했던 것처럼 마음이 고통스럽거나 승진 혹은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점집, 즉 사주, 신점, 타로카드 등을 보며 고액을 투자한다. 점집 순례는 민간신앙적이기보다 자기계발문화에 가깝다. 설령 비관적이고 우울한 패는 내담자를 실의에 빠뜨릴 수는 있지만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부추긴다. 마치 신적인 계획이 숨겨져 있다고 여기게 될 때 시련이 납득되듯 고통은 우리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는 감정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통치적 자아 탄생의 장임을 암시한다. 이렇듯 감정능력이란 사회자본 또는 신분상승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본의 한 형태일 뿐 아니라 평범한 중간계급 성원들이 사적 영역에서 평범한 행복을 얻도록 해주는 자원이다. 우리는 주부 대상의 아침 프로그램에서 상대방의 감정도 자신의 감정도 읽을 줄 몰라 상처를 주고받는 부부와 이들의 부부관계를 단번에(?) 해결한 듯 보이는 심리학이라는 마법을 관람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감정 사용 테크닉과 관련한 문화들은 과연 빈곤, 사회적 고립, 원만하지 못한 부부생활 등 인간이 겪는 고통을 실제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혹시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발생한 균열들을 은폐하고 봉합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누군가의 성공과 실패가 결국 개인의 능력 혹은 책임으로 떠넘겨짐으로서 마치 우리 각자가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라는 식의 허위적 믿음을 유포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해주는 식으로 감정은 식민화되어버린 듯 보인다. 빈곤은 경제적 착취의 결과이지 허약한 성격이나 심리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는 사회의 모순을 자아의 분열로 치환시키는 심리적 허위의식이라는 식의 비판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도르노 등의 비판이론가과 자신을 구별 지으며 자본주의 감정 문화의 내적 모순을 밝혀내는 데 주력한다. 이른바 ‘내재적 비판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녀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사적관계들이 탈육체화, 탈낭만화함으로서 차가운 친밀성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설명하는 동시에 매우 이성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여러 정보를 활용해 파트너를 물색하는 이들이 선택의 과정에서 실망, 싫증, 피로, 냉소를 느끼며, 애써 잘 고른 상대가 실제 만남에서 열정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소 허무한 결론이지만 사랑의 열정이 일어나려면 상대에 대해 무지해야 하며 육체적으로 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감정이 현실의 모순과 억압들을 은폐하고 봉합하는 데 성공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발견을 바탕으로 그녀는 홀로 통치주체가 되어 고립을 향해 가기보다 타자와 교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다. 인생을 한 나절로 보면 빛이 노루 꼬리만큼 남은 듯한데 아무 것도 안 풀려 초초한 어느 날 지인과 유명하다는 테라피스트를 찾아간 적이 있다. 명문대 출신답게 ‘사주’, ‘기’, ‘정신분석’ 등 그 깊이는 보장할 수 없지만 두루두루 알고 약간의 신끼마저 있는 듯 점의 종합선물세트 같아 흥미롭지만 듣고 나면 공허한 상담의 값비싼 대가를 치루면서 우리 모두 한 때 날렵했음에도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하는 회의가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우정을 돌보지 않고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가 지불해야 할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글_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감정적 삶』(에바 일루즈 저, 돌베개, 2010)
<목차>
감사의 말
여는 말
1장 호모센티멘탈리스의 탄생
프로이트와 클라크 강의
기업 마인드의 재구성
새로운 감정양식
기업정신으로서의 소통윤리
근대적 가족의 장미와 가시: 심리학자들이 결혼에 개입하다
결론
2장 고통, 감정 장, 감정 아비투스
자아실현 내러티브
감정 장, 감정 아비투스
심리학의 화용론
결론
3장 로맨틱한 웹
인터넷과 로맨스를
온라인데이트
존재론적 자기소개
규격화와 반복
판타지와 실망
결론: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행보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