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주를 통해 피어나는 꽃망울 – 여수 열린챔버오케스트라
지휘자 정명훈의 몸값과 엘 시스테마
얼마 전 서울시향 단장의 부적절한 발언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와중에 그 파편이 정명훈씨의 적정 몸값으로 옮겨졌습니다. 지휘자의 적정 몸값을 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 언론매체에서는 비슷한 레벨의 다른 나라 지휘자와의 몸값을 비교하기도 했는데 그때 언급된 사람 중 한명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구스타보 두다멜이었습니다. 두다멜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 중 한명으로 꼽히기도 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의 상징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엘 시스테마는 빈민지역 어린이와 청소년을 마약 폭력 등 범죄가 일상화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에게 악기를 주고 합주단을 만들어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사회적 성과뿐 아니라 음악적 성과도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국가적 지원을 받는 음악재단으로 성장한 세계적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2010년 현재 베네수엘라 각지에 221, 취학 전 단계의 어린이 관현악단 83개, 어린이 관현악단 156개, 청소년 관현악단 145개가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활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국에 촘촘히 구축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평범한 아이였던 구스타보 두다멜은 열 살 때 엘 시스테마에 참가하여 바이올린 교습을 받기 시작했으며 14세 때 부터는 작곡과 지휘를 본격적으로 배워 두각을 나타내더니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방년 17세에 말입니다. 그리고 세계적 지휘자가 된 그는 이제 많은 베네수엘라 청소년의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엘 시스테마의 아브레우와 여수 열린교회 정한수 목사
특별히 엘 시스테마에 영감을 얻어 시행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남쪽 끝자락 부근에 위치한 여수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음악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찾아가 보았습니다. 비교를 하자면 엘 시스테마를 만든 아브레우씨는 2010년도에 서울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인데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여수의 대표적 달동네 지역으로 알려진 곳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 오신 목사님입니다. 처음부터 목회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한수(59세)목사님은 70년대 유신정권 시절 공대를 다니다 군에 징집이 되었고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마침내 목회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회지가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이들이 많은 고향 땅에서 그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는 한편 야학과 노동자상담소 사업 등 힘들고 지친이들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주면서 사회적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빈민지역에서의 탁아소 사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독일 재단의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91년에 여수시 광무동에 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탁아소 사업에만 전념하기에는 지역 아이들이 너무 눈에 밟혔습니다. 지역 특성상 한부모 자녀들이 많았고 따라서 누군가의 따듯한 보살핌과 애정을 받고 자라나는 아이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지역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밥은 먹었는지, 공부는 하고 있는지, 친구는 있는지 등등을 살뜰하게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마음은 결국 공부방 개원으로 귀결되었고 아마도 지금 하고 계신 지역아동센터의 전신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지역아동센터의 재정상황이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을텐데 어째서 다른 것도 아닌 악기를 아이들 손에 쥐어주게 되었을까. 어떤 사연이 있을까.
“저희 지역아동센터에 공부와는 완전히 담을 쌓은 말썽꾸러기가 있었습니다. 센터에 오면 가방 던져놓고 나가서 실컷 놀다가 식사 시간 즈음 돌아와 밥을 먹은 후 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는 생활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도자기 체험행사를 하러 갔는데 이 아이가 갑자기 완전히 다른 아이로 변하는 거예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매우 집중해서 참여를 하더라구요. 참 신통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냥 학습활동만 시킬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과 체험을 통해 각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몰입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런데 도자기 체험 행사만 하더라도 1회 참가비가 개인당 만 오천 원인데 40명이면 그것만 해도 참 부담되는 금액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 보니 음악활동을 한다면 처음에야 악기 구입비가 들겠지만 한번 구매를 하면 오랫동안 쓸 수 있고 먼저 배운 사람이 동생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으니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음악 감상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내가 결혼 전 피아노 학원을 했던 경험도 작용을 좀 했습니다.”
▲정한수 목사(우)와 부인 이인애씨(좌). 열린지역아동센터 거실에서
그러나 방향을 정했다고 해서 일이 다 성사되는 것은 아닙니다. 외부 재단들에 많은 제안서를 제출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낙담의 숙주로 작용하기 충분했습니다. ‘서울 중산층에서도 하기 쉽지 않은데’, ‘지방에서 합주단을 할 수 있겠어?’. 주위 시선에 마음 한켠이 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번해보겠다는 배짱과 오기가 생겼습니다.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구하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결국 열성적인 ‘구함’과 ‘두드림’에 한화기업에서 응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산지원을 생각했던 한화는 악기 기증을 요구하는 지역아동센터 때문에 잠시 당황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입장에서는 예산지원을 받았는데 자칫 당장의 욕심에 그 돈을 지역아동센터 운영비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좀 저렴한 악기를 사고 나머지 돈을 운영비로 쓸지도 모르는 일이고, 한편으로는 한화 같은 대기업에서 악기를 사주는데 그래도 좀 좋은 것을 사주지 않을까 하는 실리적 판단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합주단(정식명칭 열린챔버오케스트라)의 묘목이 심어지게 된 것입니다.
정성원: 당시 매우 곤궁한 처지에 있던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이니 비올라니 첼로니 하는 악기들은 매우 낯선 물건일 텐데요.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정한수: 처음엔 신기해했는데 악기를 배우는 학생들의 자세나 태도가 대단했습니다. 몰입도도 뛰어나고요. 인원수 대비 악기가 부족해 악기 하나당 두세 명씩 돌려가며 배우게 했는데 자기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 악착같이 매달리며 참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에는 PC방도 없고 컴퓨터나 게임기도 없었죠. 물론 스마트폰도 없을 때니 마땅한 소일거리나 놀거리가 없었는데 마침 새로운 악기를 만질 수 있으니 신기하면서도 집중하게 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정성원: 악기만 있다고 합주단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처음 악기를 만지게 된 학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것이 필요했을 텐데요.
정한수: 당시 63세이던 강준아란 분이 여수영락교회 교인이면서 합창단과 합주단을 이끌었는데요, 이분이 전문 음악인은 아닙니다. 직업은 이발사인데 일을 마치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룻을 전문 음악인에게 레슨을 받아 상당한 실력을 쌓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목사님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어 마침 제가 그분에게 부탁을 좀 드렸죠.
강준아란 분에 대해 아주 짧은 정보만 듣게 되었지만 저에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아마 이발사라는 직업 때문에 더 극적인 컨트라스트가 된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쿠바가 떠올랐습니다. 남녀의 구분도 없고 직업의 귀천도 없이 시간이 나면 룸바나 살사 춤을 추고 한켠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흥겨운 재즈가 연주되는 곳. 삶과 문화가 혼연일체가 되는 곳. 강준아씨는 음악적 열정과 재능을 뽑아내며 살아가기에는 아마 쿠바가 제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강준아씨가 합주단의 기틀을 만들었다면 기량을 만개시킨 분은 김사도씨(43, 광신대 음악과)입니다. 이분은 강준아씨와는 달리 전형적 음악인 코스를 밟아왔습니다. 음대 졸업 후 영국으로 건너가 웨일스대 오케스트라 지휘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데 여수 열린챔버오케스트라와는 2012년 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교통비만 받고 매주 일요일 광주에서 건너와 어린 학생들을 수년째 세심하게 지도한다는 김사도씨.
정한수 목사님과 부인 이인애씨는 이 부분에서 김사도씨에게 무척이나 큰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간식은 물론 겨울에는 아이들 옷도 챙겨준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 지휘자의 교육의 책임과 범위를 넘어선 일입니다. 학생이든 교사든 그 경계를 넘어서야 새로운 열매가 맺어지나 봅니다. 그렇게 교사와 학생은 한 몸이 되어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열린챔버앙상블 연주회 모습(출처: 열린챔버앙상블 페이스북)
정성원: 지금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회를 꼽는다면요.
정한수: 2005년 처음 창단 연주회를 했는데...(이 대목에서 목이 메이는 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학예회 수준입니다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악기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니 아무리 수준이 낮아도 그래도 연주회를 하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강준아씨가 여름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렇게 한 3년 연습 한 후에 첫 발표회를 했는데요.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오는 거예요. 아니 우리 아이들이 언제 이런 무대 서봤습니까, 이런 격려와 박수를 받아봤습니까. 그때 오신 가족들도 그렇고 저도 콧날이 시큰해지데요. 예정에 없던 꽃다발 전달식도 하고 그랬지요.
정성원: 지난 2월에 정기연주회를 하셨는데 10회째라 감회가 새로웠겠습니다.
정한수: 그래서 연주곡에 욕심을 좀 부렸습니다. 이번에는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전곡을 연주했는데 음대생들도 학교에서 한 악장 정도 밖에 연주를 잘 안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 저희들로서는 참 대담한 도전이었던 셈이죠. 저도 부끄럽지만 첼로 연주자로 참여를 했는데 그러고 보면 저희 합주단은 초등학생부터 중년까지 연령 폭이 매우 넓고, 일반 학생에서부터 음대생까지 다양한 분야와 세대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마음으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합주단은 정기 연주회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10여 차례 노인시설 등을 방문해 연주를 들려주기도 하고 2012년부터는 매년 한두 차례 섬으로 직접 찾아가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일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합주단이 어느 정도 경력이 생기니 일반적 조직 발전 단계의 패턴처럼 몇 가지 형태로 분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2년 정도 경력의 초등생 25명으로 구성된 ‘키즈 앙상블’과 4년 경력의 주부와 직장인 10여명으로 구성된 ‘WITH US 앙상블’이 그것입니다. 이제 여수 곳곳에서 더 다양한 앙상블이 연주될 것입니다.
정성원: 자연스러운 기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꾸준히 음악을 접하는 활동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 같은데요.
정한수: 아이들 성장에는 부모의 영향이 참 크다고 봅니다. 부모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자랐느냐가 참 중요한데 이곳 아이들은 한부모 가정이 많고 경제형편이 어렵다 보니 제대로 된 보살핌과 애정을 잘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산만하기도 하고 거친 욕설도 자주 사용하곤 했습니다만 이제는 전체 분위기도 부드럽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집중을 잘 합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이곳의 학생들은 분위기가 다르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그리고 가정 형편이 어렵다보니 아이들의 꿈도 가난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없어요. 당연히 학교의 학습 과정도 뒤처지고 그러니 대학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합주단 출신의 형, 누나들이 음악 하나로 대학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을 한 거예요. 지금 일반 대학 말고 음대에 진학한 학생이 4명인데 그 학생들도 학업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 대학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내가 지금 하는 합주단 활동을 열심히 하면 자신도 어엿한 대학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두다멜이 베네수엘라 청소년의 우상이자 희망이 되었다면 비록 지금은 햇병아리 음악도일지언정 대학생이 된 4명의 선배는 어린 아이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대학생의 의미와 가치와는 무관하게 아이들 꿈의 칼라와 크기와 무게가 달라졌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부인 이인애씨에 의하면 무엇보다 제일 반가운 변화는 아이들의 자부심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것은 빈곤층 아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있어서 다른 친구들 눈을 피해 빙 에둘러 돌아서 다녔다면 지금은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남들이 하지 못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멋진 곳, 좋은 곳이라는 생각과 자부심이 제일 긍정적인 변화라고 합니다.
▲2003 창립 당시 연습 모습(좌), 2004 경로당 방문 모습(우)(출처: 열린챔버앙상블 페이스북)
십여 년 넘게 함께 성장해 온 아이들간의 밀도는 대단히 높다고 합니다. 서로 형 동생처럼 살뜰히 챙겨주기도 하고 아동센터 밖에서도 서로 만나 생일 축하는 물론 진지한 삶의 멘토 멘티가 되어 서로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비록 피 한방울 섞이지는 않았지만 꿈을 향한 용기와 도전을 서로 공유한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 더 단단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 정한수목사님은 다음 스텝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출신 음대생 4명이 각각 목포, 광주, 진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요, 매주 토요일이면 이곳으로 와서 동생들 30여명을 지도하고 있어요. 아이들은 오빠 누나를 보면서 꿈을 키우고. 선순환이 되고 있는 셈이죠. 하지만 이제 음대생들이 졸업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각자 시향 같은 곳에 들어가면 참 좋겠지만 그러려면 유학도 좀 다녀오고 해야 하는데.... 만일 그 학생들이 졸업하고 막상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합주단 문제로 다가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 중심으로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문제를 풀어가 볼까 구상 중에 있습니다. 쉽진 않겠지만 좀 더 기도하고 노력하면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난 10회 연주회에서 울려 퍼진 선율 중 하나는 빨간 머리 신부님 비발디가 작곡한 사계의 <봄>이었습니다. 이 곡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중에서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인터뷰 차 여수를 방문했을 때는 봄을 시샘하는 겨울 추위가 주변을 서성거려 몸을 잔뜩 웅크려야만 했습니다만 이성부 시인의 <봄>이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꽃샘추위가 시샘을 부려도 자연의 봄은 그렇게 오고 마는 것이지만 춥고 강팍한 우리 사회에 따스한 봄볕이 내리는 것은 마냥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며 비록 작을지라도 서로의 온기를 나눠줄 때 모진 추위를 견뎌내며 끝끝내 언 땅을 뚫고 새싹을 틔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성부 시인이 <봄>이라는 시를 통해 ‘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연에 숨겨놓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번 정기연주회의 주제는 ‘꿈이 꽃이 되다’ 입니다. 어려운 조건과 환경을 낙담의 근거가 아니라 성장의 발판으로 삼은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아이들. 비발디의 <봄> 선율처럼 생동감 있고 싱그럽게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글_정성원(수원시평생학습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