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너머>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이야기 중 한 가지 주제를 선정, 책과 함께 읽어 내려갑니다.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 한켠에 묻어두었던 고민일수도 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전혀 관심 없던 주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통해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접근해보는 것은 어떠세요? 따라 읽어나가다 보면 그 너머의 생각들을 길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편집자주) |
[감정적 삶]에 관한 두 번째 책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안톤 체홉의 단편 「애수」는 타인의 공감을 얻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암시한다. 늙은 마부 ‘이오나’는 불과 며칠 전 아들을 열병으로 잃었지만 거리에서 마차를 몰며 손님을 찾는다. 누군가에게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음 속 가득한 슬픔을 흘려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듯 그는 아들이 어떻게 병에 걸렸고 괴로워했으며 또 장례식이 어떠했는지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손님들은 그의 비통한 마음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그가 이야기에 열중하느라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기색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결국 소설은 ‘이오나’가 자신처럼 늙은 말에게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소설은 슬픔은 혼자서 위로할 수 없기 때문에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하지만,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공감은 쉽게 주어지지 않음을, 심지어 그가 슬픔에 빠져 있기에 사람들에게 기피되기 쉽다고 암시한다.
공감(共感, sympathy)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사실 낯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기도, 타인이 나의 슬픔과 눈물을 극진히 위로해주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멀고 특히 타인이 매우 큰 충격과 고통 속에 놓여있다면 공감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에서 전쟁의 참혹한 사진을 보고도 교육받은 우리가 “참사나 대량학살을 가져온 전쟁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괴물의 반응”(p.25)이라고 통렬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먼 타인이 악어에게 서서히 먹히며 울부짓는 장면을 본다고 해도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손톱 끝의 귀찮은 거스러미이지 타인의 비명은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먼 곳에서 보내온 타인의 고통을 만나지만 일상을 유지하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2003)은 현대의 시각문화를 통해 공감적 상상력의 실패가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성찰한 문명비평서이다.
그녀는 먼 곳의 전쟁 소식을 들으며 참혹한 이미지들을 날마다 소비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는 매스 미디어의 발달 덕분에 고향을 잃어버린 난민, 늑대에게 파먹힌 양인 양 들판에 버려진 주검, 붕괴된 집 앞에서 울부짓는 아이 등 타인의 고통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셀 수 없이 많은 시대에서 살고 있다. 아침마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재난의 이미지들이 우리의 시각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미국의 걸프전과 9.11 테러 이후 CNN 뉴스가 공중파를 통해 전쟁의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하면서부터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 재난을 바라보는 일은 한국인에게도 매우 현대적인 체험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재난으로 고통받는 인류의 참혹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우리의 공감적 상상력을 자극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고통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손택은 우리 자신이 이웃의 고통을 연민하고,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만족감, 즉 나는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뒤흔든다. 사건을 실제로 겪는 자와 먼 데서 그것을 ‘관망’하는 자 사이에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놓여 있다. 그녀는 타인의 고통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질문하며 ‘관망자’는 “사진들을 계속 본 나머지 충격에 빠져, 의식이 멍해질 수도 있겠다”(p.31)라고 답한다. 마치 강렬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감각이 둔해지듯이 웬만큼 충격적인 이미지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율’과 ‘충격’이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현대 시각문화의 결과물이다. 상업적 가치가 득세한 사회에서 이미지는 신경을 자극하고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진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이 점점 더 직접적으로 재현되어 오히려 현실감을 잃으면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마치 강 건너 불인 양 관망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9.11 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마치 전자오락게임의 한 장면처럼 여겨져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전쟁을 기록, 고발하는 사진의 도덕성이 약화되고 타인의 고통은 오락거리 인 양 소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타인의 고통은 잠시 동안 우리를 괴롭힐 수는 있지만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모종의 도덕적 결단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관망자로서의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마치 외설적인 포르노그라피인 양 소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실린 레온티우스의 일화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서 시각적 쾌락을 느끼기조차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레온티우스는 어느 날 처형당한 시체가 즐비한 곳을 지나던 중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 그러나 끝내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채 자신의 손을 눈에서 치우며 “망할 나의 눈아, 이 아름다운 광경을 즐겨라”라고 절규한다. 사실 이러한 경험은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헐리우드 공포영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초과하는 괴물 앞에서 흡사 얼어붙은 듯 혼이 나간 미인의 모습을 매혹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스펙터클할수록 관객의 시각적 쾌락은 더욱 커진다. IS 참수 동영상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격하게 퍼져나가는 기이한 현상이 증명하듯 학살, 강간, 신체 훼손 등 타인의 고통을 역력히 담은 사진들은 자꾸만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시각적 쾌락의 카니발로 인도하는 초대장을 거절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손택은 인간이 이렇듯 끔찍하고도 혐오스러운 장면에 그토록 끌리는 이유를 에드몬드 버크의 설명을 빌려와 ‘관망’이 자신의 감정을 극복하는 일이자 금기시된 성애적 지식을 해방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통상적 상상력을 압도해 전율적 공포를 안겨주는 시각적 대상은, 자신은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는 일정한 거리만 확보된다면 나약함에 맞서 자신을 단련하는 기회, 즉 ‘숭고’의 쾌락을 안겨준다. 타인의 고통은 정신적 고양감을 불러일으키는 유의미한 자극이 되는 것이다. 손택은 이러한 감정이, 고통을 잘못되거나 거부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대인에게 매우 낯설 것이라고 단서를 달아두었다. 그러나 문명은 매너화 과정을 통해 슬픔과 눈물 같은 인간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감정들을 여성 젠더와 동일시해 경멸 혹은 기피 대상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는 어떤 충격이나 시련 속에서도 슬픔이나 우울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이끌리지 않는 강인한 모험가를 요구한다.
그런데 손택의 책을 읽으며 자신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참혹한 이미지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희생자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결코 그것을 소비하지 않았다고 항의하고 싶은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택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p.154)라고 일축한다. 즉, 연민은 타자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자신은 비껴나 있다는 데서 비롯된 만족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연민은 타인에게 고통을 준 것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식으로 면죄부를 주는 뻔뻔한 감정이라고 지적한다. 즉, 연민은 용의자의 무죄증명을 위한 증거, 즉 타자의 고통에 대한 알리바이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육을 받고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괴물’을 면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을 그칠 수 있을까? 손택은 사진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윤리적 의미를 부인하기보다 사진은 일종의 초대장으로 우리를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게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공감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우려 한다. 사실 ‘사건’의 밖에 있는 사람이 희생자의 고통에 공감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타인의 체험을 알 수도 없고, 타인이 되어보는 상상을 할 때조차 ‘나’ 자신을 떠날 수 없다. 희생자 역시 우리의 응시를 뚜렷이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이 절망적인 질문들 앞에 손택은 고통받는 타자와 우리가 한 지구상에 존재하며, 우리의 특권 혹은 행운이 그들의 불행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하라고 답한다. 그러니 희생자를 쉬이 추방하지 않고 마음과 기억 속에 오래 두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는 두려움만이 타자의 불행을 소비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는 곧 사회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것 역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글_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타인의 고통』(수전 손택 저,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감사의 말
부록
1. 문학은 자유이다
2. 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
3.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4.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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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감정적삶①] 신경숙 『외딴방』 /suwon/8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