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by [칼럼] 나무늘보들의 1년

글작성자 평생학습동향리포트 신청일 Mar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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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들의 1


50년 후 인간은 여전히 모여 살지만, 밥은 각자 자기 방에서 따로 먹고, 배변은 둥글게 배치된 변기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일을 볼 거란다. 어느 미래학자의 예언이다. 과연 그럴까 심히 의심스럽지만, 그렇게 되지 말란 보장도 없다. 개인주의가 더 가속 되면 한 식탁에 둘러앉는 일이 점차 야만으로 간주될지 누가 알랴. 그 보상으로, 원초적 쾌감의 순간과 대화의 즐거움을 접합하는 관습이 출현하는 일도 얼마든지 상상 가능하다  

. ‘저녁 먹고 슬슬 책 한 권 끼고 찾아갈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동네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거다. 읽다 지치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읽고 대화하고, 그러다 졸리면 책 끼고 돌아가서 자면 된다. 이름 하여 책 마실. 이런 모임이 동네마다 있는 도시가 인문학 도시 아니겠나.’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는 이미 이런 책읽기 모임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모여 특정 주제의 책을 낭독하는 방식으로 읽는다. 이 방식을 마을 버전으로 가져가면 어떨까라는 게 저 포스팅의 의도였다. 경험으로 미루어 세미나식 책읽기는 웬만해서 유지 자체가 어렵다. 읽는 부담, 발제 부담이 크기 때문에 마을에 적용하면 백이면 백 실패할 공산이 높다. 하여 착안한 게 수원시평생학습관 식 낭독을 적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함께 하겠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3월 첫 주에 일단 모여 보니 10명 정도나 됐다. 장소가 없어 일단 매탄4동 주민자치센터의 방을 하나 빌렸다. 평균 연령 50대 초반, 직업도 다양하고 살아온 경로도 다채로웠다. 몇 권의 책을 가지고 가서 처음 읽을 책을 투표로 정했던 것 같다. 다음 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모여 2시간 동안 녹색평론135호를 읽기로 했다.


모임 이름은 나무늘보 읽기모임으로 정했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가장 느린 포유류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가보자는 거였다. 지난 1년 동안 나무늘보들은 매주 모여서, 두 페이지 읽고 수다를 한 시간씩이나 떨기도 하고, 지겨운 책 빨리 끝내자는 이심전심에 두 시간 내내 돌려가며 낭독만 한 날도 있다. 그렇게 작년에 읽은 책이 녹색평론135, 듣기의 철학, 문명 그 길을 묻다-세계 지성과의 대화(경향신문 신년기획 연재분을 모아 가제본한 것), 도시의 로빈후드, 보다-김영하 산문집5권이다.


2015년 들어서는 김용호 교수(성공회대)3의 길을 읽고 있다. 현대물리학과 복잡계이론, 최신 인문사회과학의 성과, 심원한 종교적 가르침까지 종횡무진 하는, 쉽지 않은 저술이지만 역시 멈추지 않고 느릿느릿 읽어나가는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나무늘보들인지도 모르겠다.


면벽 수행하듯 책과 씨름하며 새로운 사유를 열어가는 입장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에게 특히 어른들에게 낭독은 낯선 형식일 게다. 행간을 미끄러지듯 유영하면서 독서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이들에게 낭독은 부질없는 짓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낭독은 묵독할 땐 몰랐던 세부를 느끼게 해 주는 장점이 있다. 낭독자의 목소리가 함께 책 펴들고 둘러앉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되기도 하고, 수다를 통해 행간의 의미를 넓고 깊게 확장하기도 한다.


모든 점이 만족스럽지는 않다. 같이 출발했던 분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이런 저런 사유로 그만두었다.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부분에서 읽기 형식 때문에 아쉽게도 멈추어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도 중간에 합류하신 분들까지 열심히 참여하는 걸 보면, 낭독과 수다를 접합한 이 실험을 더 확대해도 괜찮겠다 싶다. 며칠 전 나무늘보 1주년을 맞아 SNS에 다시 글을 올렸다. ‘인문학 도시라면 이런 모임이 한 백 개쯤 더 생겨야 안 되겠나?’


_양훈도(한벗지역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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