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by <와 배움터>파울로 프레이리③: 프락시스와 의식화

글작성자 평생학습동향리포트 신청일 Feb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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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배움터>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관련 책을 읽으면서, 강의 등을 통해 우리는 많은 교육학자, 그들의 사상, 철학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저 막연히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교육학자나 이론, 철학적 배경을 모른다고 큰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앎이 없으면, 스스로의 학습이 없으면 쉽게 한계에 부딪힙니다.
<와 배움터>에서는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던 교육 이론들을 핵심 키워드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풀어내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짧지만 본 지면을 통해 함께 학습하기를, 학습의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만날 학자는 평생교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파울로 프레이리입니다. 프레이리의 생애부터 사상의 핵심적인 주제(해방, 프락시스와 의식화, 대화)를 4회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편집자주)

 

실천하는 삶: 프락시스

 

프레이리의 교육학은 해방의 교육학, 즉 인간화라는 궁극적인 목적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의 교육학에서 인간은 세계에 참여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게다가 누군가(또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존재를 억압하고 있다면, 교육의 목표는 이러한 억압적 상황을 인간화 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프레이리에 있어서 학습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활동과 불과분의 관계가 있으며 이 때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 프락시스(praxis)이다.

 

수영은 하면서 배운다

 

프락시스는 흔히 ‘실천’으로 해석되는데, 이때 실천이란 의식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실천이다. 즉, 실천을 위한 실천이 아니라 인간의 추론 능력이 결합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수영을 어떻게 배울까? 수영을 배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수영을 배우는 방법이 그 첫 번째다. 흔히 우리가 세상을 교과서로 배우는 방식이 이렇다. 수영의 역사, 원리, 기초, 영법 등 수영과 관련된 온갖 이론적 지식들을 교과서를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수영과 관련된 모든 지식을 알았다고 수영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수영을 배우는 두 번째 방법은 수영을 하면서 배우는 방식이다. 대부분 우리는 수영을 이런 방법으로 배운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수영하는 법을 직접 해봄으로써 터득한다. 수영장에서 강습을 받은 사람이라면 강사의 설명을 듣고, 강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서(즉, 직접 물속에서 수영을 해봄으로써) 수영을 배우게 된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프락시스로서 학습은 후자의 경우에 일어난다. 학습자는 수영을 몸으로 익힌다. 그러나 여기에서 몸으로만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식 활동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강사의 설명을 듣거나, 또는 동네 형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즉 수영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습득한 후) 학습자는 직접 해본다(이론적 지식을 몸으로 실행해 본다).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학습자는 수영을 하게 되고, 또한 이런 실행과정을 통해 자기가 갖고 있었던 수영에 대한 지식을 넓힌다. 즉, 실행을 통해 의식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다시 이런 의식의 성장은 학습자의 실행에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우리의 실천 활동과 의식 활동은 끊임없는 상호작용(시간적 선후 관계일 수도 있고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는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한다. 어느 정도 수준급의 운동선수들은 그 분야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을 갖고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실천 활동은 끊임없는 의식적 개입과 실행의 개선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프락시스란 이러한 실천과 의식의 멈추지 않는 고양의 과정이다.

 

실천을 이끄는 의식, 의식을 이끄는 실천

 

해방의 교육학에서 이런 프락시스의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해방의 과정이 의식과 실천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일 수도 있지만, 제도와 문화의 형태로 억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억압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실천 없는 의식’ 또는 ‘의식 없는 실천’으로 이러한 억압적 상황을 자각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에 참여할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자각과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 활동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먼저, ‘실천 없는 의식’을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를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데 일종의 관념적, 관조적, 냉소적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억압이 없는 완벽한 사회에서 이런 태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에서(즉, 해결해야 하는 사회적 모순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태도는 그 억압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보자.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서 주인공 네오(Neo)는 세상의 버그(오류)를 자각하고 실체를 알고 싶어 한다. 그가 그 오류에 대한 자각에서 멈췄다면, 즉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의 세계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네오의 인식 수준도 그대로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의식 없는 실천’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자각 없는 실천은 우리를 맹목적인 인간으로 만든다. 세상에 대한 교조적 태도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다시 매트릭스의 예를 들어보자.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계와 대결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 사랑에 대한 새로운 자각도 이루어진다. 주인공은 맹목적으로 목적만을 향해 달리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멈추지 않는 성찰을 통해 주인공 네오는 인류의 구원자로 성장해 간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과 실천의 상호작용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기계가 만들어 놓은 가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초극하는 초인이 되면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초인이 된 주인공에게는 또 다른 삶의 과제와 문제들이 펼쳐질 것이다.

 

프락시스적인 성장의 과정: 의식화

 

프레이리는 프락시스적인 성장의 과정을 의식화(conciousness)라고 불렀다. 의식화라고 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특정한 의미로 쓰였다. 대학 들어갈 때 나의 아버지는 ‘의식화 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의식화된다는 것은 학생운동에 참여한다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아마도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가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 사회에 ‘의식화’라는 용어가 특정한 의미를 얻어 생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의식화는 정확히 말하면 ‘비판적 의식화’(critical conciousness)를 의미한다. 프레이리의 의식화란, 단지 의식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프락시스적인 실천의 고양과정, 즉 사회적 모순에 대한 자각과 실천을 통한 그 모순의 해결 과정을 내포한다. 또한 개인의 의식화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와 관련된 집단 의식화를 의미한다.
이 때 ‘비판적 의식화’는 유사 의식화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프락시스적인 성장의 과정을 의식화의 과정이라고 보았을 때, 우리는 어느 정도가 만족스럽게 의식화된 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 한 사례를 보자. 1990년대 초반에 달동네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세입자들 중심으로 철거 싸움이 일어나던 시절(요즘도 일어나는 일이다!), 당시에 이 싸움에 앞장서서 주민대책위의 리더로 성장하였던 주민이 싸움이 끝나고, 훌륭한 부동산 투기꾼이 되었다. 주민들을 위한 철거 싸움 과정에서 알게 된 지식을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한 경우다. 이런 경우도 ‘의식화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충분한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사람은 무지의 상태에서는 벗어났지만,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식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영악한’ 방식으로 지식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존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기계와의 싸움 과정에서 얻은 힘으로 또 다른 매트릭스를 만들거나, 기계들과 타협하여 권력을 나눠 가진 후 지배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가 ‘의식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지배층’들을 많이 본다)

 

프레이리는 그의 저서 『Education for critical consciousness』에서 의식을 네 수준으로 보았다(이런 선형적인 접근이 갖는 한계는 일단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다). 첫 번째 단계가 변화불능성(intransitivity)의 상태이다. 이 수준에서 인간은 사실상 생물학적 필요성에만 매몰된 동물적 상태에 머무르며 사회문화적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두 번째가 준변화가능성(semi-transitivity)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회문화적 상황을 주어진 것으로, 운명적인 것으로, 그래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세 번째는 순진한 변화가능성(naive transitive consciousness)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만 소박한 수준이다. 이 경우 학습자들은 문제들을 단순화 시키고 엄밀한 접근을 하지 못한다. 또한 대화보다는 논박을 즐긴다. 마지막이 비판적 변화가능성(critical transitivity)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주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식을 갖추게 된다. 문제들을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자기가 ‘발견한 것들’을 시험하고, 재검증할 용의를 갖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판적 의식화’는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고뇌하는 미완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의식화 자체가 변화가능성을 획득하는 과정이고 이 변화가능성이란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는 성찰과 실험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판적 의식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순진한 상태’나 또는 ‘영악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비판적 변화가능성의 과정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이를 위한 구체적 교육 방법론(또는 학습 방법)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프레이리식 답변은 다음 호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글_허 준(영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파울로 프레이리①: 프레이리의 삶과 사상 /suwon/issue/76166
☞파울로 프레이리②: 해방의 교육학 /suwon/issue/77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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