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피랑의 그녀, 통영의 벼랑에 서다
장정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의 맨밥을 김에 돌돌 말아서 깍두기와 오징어무침에 먹는 음식을 일컬어 충무김밥이라고 합니다. 천안 호두과자가 천안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다 판매가 되듯 충무김밥도 거의 내셔널 브랜드입니다만 충무김밥 먹자촌은 충무가 아니라 통영에 위치해 있습니다. 1995년에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영시로 통합 되었기에 충무김밥은 자신의 도시 정체성을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통영을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게 소개하자면 ‘해안선의 총 길이는 617km로서 유인도 41개, 무인도 109개의 총 150개의 부속도서가 있고,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시청은 무전동에 있고, 1읍 6면 8동으로 행정구역이 구성된다.’(출처: 위키피디아)
이렇게만 해도 하품이 나올듯한데 여기에 지루한 숫자 몇 개를 추가해 보면 이렇습니다. ‘2014년도 경상남도 재정자립도가 26.4%인데 통영은 2013년보다 6.2%가 떨어진 16.3%를 기록했습니다.’ 재정자립도도 낮을뿐더러 재정건전성이 매우 취약한 편입니다. 육지 면적은 좁은데 구릉이 많고 무인도 중심의 섬으로 이뤄진 14만 인구 도시 통영. 기반 시설과 부존자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야 할 곳은 천혜의 풍광과 맛과 멋을 갖춘 문화이며 그것을 활용한 관광일 것입니다. 게다가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사실 이런 표현은 정말 비추다)라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네이버에 물어 보았습니다. ‘통영에서 가볼만한 곳은?’ 다양한 지역이 소개되었지만 질문에 대한 네티즌의 답글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 한 곳 있었습니다. ‘동피랑 벽화마을’이 그곳입니다. 정말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곳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1월 21일, 통영시 고속버스 터미널에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이동을 하는 도중 기사분에게 넌지시 질문을 했습니다.
“통영에 관광 오면 어디 둘러볼만한 곳이 있나요?”
“배 타고 나갈라카믄 조기 매물도도 좋고 아니믄 동피랑도 좋지에.”
“동피랑에 많이들 가나요?”
“제가 뭐 있다고 인터뷰를 하시려고요. 아니면 그냥 이메일로 하시지 이리 먼데까지….”
개인에 대한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고 왕복 9시간의 이동거리이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동피랑 사업에 대한 이야기부터 물었습니다. 언젠가 철거 위기에 몰린 마을이 벽화마을로 되살아났다는 기사를 보며 무릎을 탁 치던 경험, 그 이후 수많은 블로거들이 속보경쟁이라도 하듯 쏟아내는 깨알 같은 포스팅, 그리고 KBS 등 공중파들의 보도와 각종 미디어를 통한 노출로 인해 언제 통영에 가면 나도 한번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었고 실제로도 두 번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피랑이 누구의 머리와 열정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질 않았습니다. 영웅주의 사관에 대한 거부감이 기저에 깔렸지만 마을만들기가 어떤 한 두 사람 몫으로 돌려질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상식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해당 일꾼이 일궈낸 기획과 노력과 성과를 그냥 묻어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수면 위로 끌어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지 그 일꾼을 추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함께 따라 배우기도 하고 노하우를 전수 받으며 마을만들기의 질과 양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피랑 마을만들기 사업이 처음부터 벽화마을 컨셉이었나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제가 2006년 10월 통영21에 왔는데 그때 동피랑 철거문제를 긴급의제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피랑에는 80여 가구 120여 명이 살고 있었는데 고령자도 많고 특별히 대비책을 마련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급한 마음에 주민들을 만나러 다니는데 딱히 의논할 사람도 없고 대책위를 만들려고 해도 주민들이 ‘대책위가 뭐꼬?’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고 시에서 충분한 보상을 해주나요. 보상금으로 500만 원도 안준다고 하는데 사실 그 돈 가지고 어디 방 한 칸 구하기도 힘들거든요. 그러니 떠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러면 이분들을 다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정비를 좀 해서 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장님 면담을 신청했죠. 다행히 시장님(당시 진의장 시장)이 오픈 마인드여서 가까스로 강제 철거를 면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딱히 어떤 컨셉으로 마을만들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문제를 풀었습니까?
처음엔 담쟁이를 할까 하다가 일단 주민들한테 벽을 빌려달라고 했어요. 제가 프랑스 몽마르뜨나 이태리 등 여러 곳을 다녀본 경험도 있고 통영이 예향 예향 하는데 사실 체감할만한 공간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리고 너무 겁먹을 것도 없이 일단 한번 부딪쳐 보자는 마음을 먹고 주민들한테 벽을 빌려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벽만 빌려주면 안 쫒겨나나?’ 하시기도 하고 ‘번잡스럽게 그런 일 안 할란다’ 하시는 분도 많이 계셨죠. 그래서 처음엔 한 20% 정도나 됐을라나요. 그래도 끈질기게 만나서 얘기하고 설득을 하니까 주민들이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았는데 그래도 누군가 손을 잡아준다는 느낌을 받으셨나 봐요. 공무원들은 주민의 민원이나 싫은 소리를 잘 견디지 못해요. 주민이 ‘나 그런거 안 할란다’ 하면 다음부터는 찾아가지를 않죠. 그런데 우린 그러나요. 열 번 스무 번 그런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고 계속 접촉하다 보면 결국 서로의 진심이 통하는 거죠.
그 후에 한 80% 정도 벽을 빌려 주셨는데 사실 자원이 부족해서 처음엔 다 그리지도 못했어요. 공모사업에 선정돼서 시비는 전혀 없이 국비 3,000만 원을 가지고 진행했는데 우선 전국에서 참여할 화가를 모집했거든요. 19개 팀 40여 명 정도가 참여를 했는데 통영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어요.
▲2012년 동피랑 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의 모습(사진제공: 통영21)
관광객의 방문과 마을 발전의 선순환 시스템 구축
윤미숙씨는 지금의 동피랑 마을을 있게 한 것은 본인도 아니고 주민도 아니라 그 벽화 그리기에 참여했던 화가들이라며 그분들에게 공로를 돌렸고 아직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벽화마을이 어디 한두 군데입니까. ‘벽화마을’을 검색어로 웹서핑을 하면 수 십 군데의 벽화마을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희소성과 경쟁력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쁜 그림으로만 채색되어 있다면 그것은 한두 번의 호기심으로 유통기한이 끝날 수도 있고 오히려 주민의 일상생활을 침해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동피랑만의 문제가 아니라 벽화마을이 가지고 있는 숙명적 문제일 것입니다. 윤미숙씨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갔을지 궁금했습니다.
"고민이 많았죠. 그래서 먼저 전국의 다른 벽화마을을 돌아다니며 벤치마킹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은 수성이다 보니 풍화 작용에 오랜 시간 견디질 못해요. 또 똑같은 그림만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2년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려서 지속적인 방문의 토대를 만들었고요. 그런데 그림이 단지 관광객의 눈길만 사로잡으면 주민 입장에서는 피곤한 일상이 될 수 있잖아요. 해서 관광객이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도록 하고 이 수익금을 주민의 생활에 연결시키는 선순환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민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기념품점인 ‘점방’과 ‘구판장’을 만들어서 수익금 전액을 지역주민에게 환원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80여 가구의 수도세와 쌀값에 사용을 했는데 이런 노력 때문인지 이후 주민들의 참여가 더 끈끈해진 것 같아요. 사실 벽화와 주민이 겉돌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주민이 인상 쓰고 있으면 누가 가고 싶겠어요. 하지만 관광객의 방문이 주민 삶의 향상에 도움이 안 되면 또 그걸 주민한테 바랄 수도 없거든요. 그것을 어떻게 시스템, 공존화 시키느냐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동피랑은 벽화의 그림이 바뀌어 가듯 주민들의 생활 형태도 조금씩 변해나가기 시작했고 현재는 구판장을 넘어 주민 80여 명이 참여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지속가능한 운영 주체를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철거의 공포 속에서 마을을 떠나지만 않으면 좋겠다던 소박한 바람은 이제 마을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으로 단단히 성장했습니다. 작년에 주민대상 설문조사를 했는데 ‘동피랑 주민으로서 자랑스럽다’는 대답이 86% 나왔고 이사 가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는 마을로 변했습니다.
통영시 자체 집계 연간 1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동피랑은 단지 동피랑 마을을 넘어 인근 중앙시장의 활성화로도 연결되어 한국 마을만들기 역사에 있어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성과의 한 지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닭회의 합시더 - 땅을 팔아 활동하다
동피랑이 갑작스런 이슈에 의해 진행한 일이라면 2007년부터 시작된 연대도 에코아일랜드 사업은 사전에 계획된 프로젝트입니다. 이 사업에는 약 40여억 원 정도가 투입되었는데 시 예산은 전혀 없으며 이 비용 일체를 공모사업 선정을 통해 충당하였습니다. 지경부의 에너지 자립시범마을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13억 5천만 원을 지원받았고 이외에도 안전행정부, 경상남도 등으로부터 국비와 도비를 지원받아 40여 가구 80여 명의 작은섬 연대도를 화석연료 제로 생태에너지 자립마을로 탈바꿈시키는 사업을 시행한 것입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섬사람 특유의 거친 욕설과 냉대에 눈물 바람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연대도를 300번도 넘게 다니는 끈기와 열성 앞에 주민들도 마음의 빗장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태양광 발전소를 통해 마을에서 필요한 전기를 100% 충당하고 있으며 마을회관 등의 주요 건물은 패시브 하우스로 만들었고 폐교는 에코 체험센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연대도 마을은 전국 200여 곳이 넘는 지자체와 각종 기관 등이 벤치마킹해 갈 정도로 에너지 자립마을 관련 중요한 모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남편 몰래 조그만 땅을 팔았어요.”
마을만들기의 과정은 곧 사람만나기입니다. 때로는 단 한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수십 번 찾아가야 하는 것이 이 사업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비용을 발생시킵니다만 그렇다고 이런 일들을 기관에서 다 정산처리 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주민과 마을을 향한 애정과 욕구는 때론 급여보다 많은 비용을 발생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져야만 했습니다.
“어르신들이 회의하자고 하면 뭐 좋아 하나요. 연대도는 섬이라서 통닭이나 삼겹살 떡 이런 것들을 좋아 하시거든요. 그래서 이런 음식을 사가지고 가서 ”통닭회의 합시더“ ”삼겹살 파티 합시더“ 하면 그날이 잔칫날이고 회의하는 날이 되는 거예요.”
동피랑 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일 마치고 술 한 잔 하고 싶다고 하면 결국 윤미숙씨가 지갑을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미숙씨는 해고 이후에도 여전히 마을 곳곳에 대해 관심을 거두질 않고 있었습니다.
※『춤추는 마을 만들기』는 최근 발간된 윤미숙씨의 저작이다.
날벼락 같은 부당해고 통보
“서피랑을 어떻게 할지 참 걱정이에요.”
동피랑보다 더 열악한 곳 서피랑. 한때 집창촌이었고 소방도로도 없는, 통영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인 서피랑은 인근에 박경리 생가가 있어서 잘만 연결하면 새로운 문화마을로 탈바꿈할 수도 있겠다고 합니다. 이제 1단계 사업으로 서피랑 99계단에 그림 그리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려 서피랑 주민들을 만나던 날인 2014년 12월 29일, 윤미숙씨는 난데없이 구두로 해고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법률적으로만 보면 윤미숙씨는 2년 단위로 계약을 맺어 왔는데 이미 계속 계약갱신을 하여 9년 동안 일했기 때문에 현행 규정상 무기계약직에 해당합니다. 그렇다고 해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고를 위해서는 적정한 사유와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해고통보도 한 달 전에 하게 되어 있는 규정을 무시하는 부당해고를 한 것입니다. 그녀의 해고 통보서에는 ‘근로계약 기간만료’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지방선거 직후인 8월경에 통영시로부터 감사를 당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특별한 지적사항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인력 2~3명이 일하는 기관에, 그것도 8월에 감사를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특별한 제보가 있거나 확실한 무엇이 있지 않는 한 일반 지자체에서 흔히 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주변에서 ‘표적감사’라고 수근거릴 만한 충분한 사유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부당한 처사에 대해 윤미숙씨는 ‘개인에 대한 해고가 아니라 마을만들기에 대한 해고’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한 2년 정도 더 현장에서 일하고 그 후에는 마을만들기를 일굴 후진을 양성하는데 진력하고자 했던 진로계획도 다 엉클어져 버렸습니다. 심혈을 기울인 통영에서 벼랑으로 몰리고 보니 당장 어떻게 해야겠다는 구체적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만은 명확히 할 생각이랍니다.
“행정에서 부당행위를 하면 안 되잖아요. 그것만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입니다.”
박부임 할머니는 동피랑 마을에서 ‘할머니 바리스타’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초기부터 쭉 지켜보아 온 사람이기에 윤미숙씨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현재의 마을이 만들어졌는지를 세세히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윤미숙씨의 해고소식을 듣고는 혹시 도움이 될까하여 방문객으로부터 설문조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윤미숙씨는 마을 주민을 보면 눈물부터 흘릴까봐 아직 동피랑에 가보질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 박부임 할머니의 소박한 바람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태껏 그래왔듯 윤미숙씨는 통영의 벼랑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어디선가 또 다른 어무이, 아부지와 함께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앞에 언급했던 택시 기사분과의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기사님 혹시 윤미숙씨 아세요?”
“동피랑 만든 사람 아닌겨.”“어떻게 아세요?”
“음마, 발싸 소문 쫘아 돌았다 아닌겨. 그라믄 안되제. 일을 잘 못혀도 그리 쫒까 내는기 아닌디 그 냥반 일 참 잘했담서. 아니 상줘도 모지를 판에 그리 하믄 안되지.”
글_정성원(수원시평생학습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