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by [칼럼] 낭송의 발견

글작성자 평생학습동향리포트 신청일 Jan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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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의 발견

 

문탁네트워크는 ‘마을에서 만나는 인문학 공간’이다. 우리 홈페이지에는 “문탁네트워크는 친구와 함께 공부를 통해 삶의 비전을 찾아가는 작고 단단한 네트워크입니다 / 우리의 공부가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공부가 되기를 꿈꾸는 곳 / 수천 개의 공부가 수천 개의 삶으로 창안되는 곳 / 수천 개의 삶이 마주치면서 엮어가는 유쾌한 마을 / 문탁네트워크는 그런 공부를 꿈꿉니다 / 문탁네트워크는 그런 마을로 향하는 작은 길입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러나 ‘마을에서 만나는 인문학 공간’에서의 공부가 어떤 모양을 띌 수 있는지, 혹은 어떤 모양을 띄어야 하는 지를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5년간 우리 내부에서는 공부의 내용과 형식을 둘러싸고 수없이 많은 논란이 있어왔는데, 한쪽에서 공부의 밀도를 높이자고 독려하면 다른 한쪽에서 문탁의 공부 문턱이 너무 높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고, 또 한쪽에서 세미나 시간 지키기, 후기 꼭 쓰기 등을 강조하면 또 다른 한쪽에서 인문학 공간이 꼭 학교 같다는 볼 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우리의 공부가 너무 세다고, 또 누군가는 우리의 공부가 너무 약하다고 투덜거렸다. ‘대중지성’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어쩌면 문탁의 지난 5년간은 그것을 묻고 또 물어왔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이 와중에 올해 야심차게 시작한 새로운 공부의 형식이 낭송이다. 가장 평범하지만 - 그런 점에서 말 그대로 ‘누구나’ 할 수 있다 - 사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랫동안 지혜를 터득하는 방법이었던 그 낭송을 마을 인문학 공간에서 한번 실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발제도 없고 토론도 없는 세미나. 오로지 소리로 낭송하고, 온몸으로 낭송하고, 혼자서 낭송하고(독창!), 함께 낭송하고(떼창!), 읽으면서 낭송하고, 외워서 암송하고…. 소리의 힘에 의존하여 텍스트를 독파하는 세미나. 그런 <낭송 세미나>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첫 텍스트로 <낭송 춘향전>을 선택했다. 이야기의 힘, 말의 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텍스트로 판소리계 소설만큼 적합한 것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불안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읽기만 하는 것으로도 세미나가 될까? 낭송과 암송이 정말 우리의 감각을 변화시킬까? 
 

“춘향이 그제야 못 이기는 체하며 겨우 일어나 광한루 건너갈 때 대명전 대들보의 명매기 걸음으로, 양지 마당의 씨암탉 걸음으로, 흰모래 바다의 금자라 걸음으로, 꽃같이 어여쁜 얼굴 달같이 고운 태도 천천히 건너간다. 월나라의 서시 같은 예쁜 걸음으로 하늘거리며 건너온다. 도련님 난간에 절반만 비껴서서 은근히 바라보니 춘향이가 건너온다.”

 

춘향이와 이몽룡이 처음 눈 맞은 그 장면을 낭송하면서 우리 모두가 명매기가 되었다가 다음엔 씨암탉이 되었다가 또 그 다음엔 금자라가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오버’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서 정말 우리가 목소리를 통해 그렇게 타자-되기를 실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춘향이와 몽룡이가 홀딱 벗고 수작을 부리면서 노는 19금 장면에서는 그들의 건강한 섹슈얼리티, 즉 생명의 기운이 소리를 타고 내 몸속에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고, 월매가 옥에 갇힌 춘향이를 안타까워하면서 탄식하는 장면에서는 월매의 설움에, 나아가 모든 억울한 자들의 설움에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정말 그랬다. 낭송은 “주제를 파악하고 교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의 흐름에 접속하여 그 기운을 훔치”(고미숙, 『호모 큐라스』)는 과정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낭송세미나가 어떻게 진화할 지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듣기와 말하기의 집합적 문화가 사라진 시대에, 공동체에서의 공부조차 지식의 축적이라는 근대적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낭송이 분절된 지식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구하는 새로운 공부의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그 기대를 안고 오늘도 춘향전의 <백발가>를 외우고 있다.

 

글_이희경(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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