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by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을 수는 없다

글작성자 평생학습동향리포트 신청일 Dec 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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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서재

『계속해보겠습니다』(황정은 저, 창비, 2014)

 

충격적인 사건의 여파 탓인지 한 해를 마감하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트라우마 사회, 국가 없는 사회 등 새로운 언명들이 착취사회, 피로사회, 허기사회, 잉여사회 등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용어들을 밀어내며 우리 시대의 심연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 발생 이후, 시대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아마도 삶의 의미를 붙들 수 없어 적막하기만 한 마음들, 즉 상실의 감각이 아닐까? 최근 발간된 황정음의 장편 계속해보겠습니다덧없음이라는 무기력한 감정이 날 것의 시대 감각일 지 모른다는 생각을 안겨준다. 분노나 냉소와 달리 현실 비판의 추진력을 내장하지 못한 흐릿하고 힘없는 감정들이 분주하고 쾌활해 보이는 시대의 표면 아래 잠복해있는 것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소라, 나나, 나기 세 사람의 이야기이다. 한창 나이의 젊은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은 고요하고도 고요하다. 언뜻 90년대 하루키 소설에 등장한 열정없는 젊은이들이 연상된다. 대학을 나왔지만 입사(入社)의 의지가 없고, 섹스는 하지만 연애를 기피하는 하루키의 주인공들처럼 인정투쟁에 대한 욕망이나 열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 주인공들의 무위가 전후 항진과 초조의 시대분위기 속에서 부국강병을 향해 달려온 일본 사회와 아버지 세대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데 비하자면 황정은의 주인공들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이들은 끊어진 다리, 무너진 탄광, 침몰한 여객선, 추락한 비행기 등 인간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재난에 노출된 트라우마 세대이기 때문이다.

소라와 나나는 아홉 살과 열 살 이후로 거의 고아처럼 자라난다. 공장에 다니던 아버지가 기계에 상반신이 말려들어가 참혹하게 으깨진 채 죽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소라네 가족과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삶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본래 사랑이 많아 이름도 애자(愛者)’인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고 이후로 차마 사랑하는 이를 비워낼 수 없어 상주가 되어버린다. 그녀는 참혹한 죽음을 결코 지울 수 없어 오로지 죽은 자를 기억하고 추념하기 위해 살아있는 애자(哀者)’이다. ‘어머니 노릇을 수행할 수 없는 그녀가 딸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은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12p)는 조언이다. ‘애착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덜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 수업이라기보다 애도하지 못한 상실의 트라우마를 암시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저 사고가 아니라 사람을 점차로 못쓰게 만드는 폭력, 즉 재난이기 때문이다.

장녀인 소라는 어머니의 명제에 가장 깊이 침윤되어 있다. 슬픔처럼 강한 전염력을 가진 감정도 없는 듯 어린 자매를 방치한 어머니를 미워하지만 세상 만사를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분류하는 슬픈 유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섹스를 포함해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는 것을 혐오해 소라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멸종하기를 희망한다. 반면에 한 살 어린 여동생 나나는 비교적 트라우마를 잘 극복한 듯 보인다. 고립을 자처한 소라와 달리 연애 끝에 혼전 임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나 역시 뜨거운 열정을 결여하고 있다. 그녀가 구애를 물리치고 자발적으로 미혼모가 되는 것은 아이 아버지 집안의 가부장성 탓이 아니라 사랑의 온도가 뜨겁지 않아서이다. 그녀 역시 재난이 남긴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애틋하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감정의 불가능성은 불시에 들이닥쳐 삶을 부수고 인간을 모욕하는 재난이 남긴 후유증이다.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감을 박탈하고 삶에 대한 불신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재난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폭력이다. 그것은 희생자는 물론이고 사건의 외부에 있는 이들의 영혼마저 상처입힘으로써 최소주의의 삶을 지향하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무책임하게 독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 재난은 각각 고립된 개인 간의 상호의존을 유도함으로써 우애어린 커뮤니티를 탄생시키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황정은은 슬픔이 단지 우리 자신을 각자의 슬픔의 벽으로 밀어넣는 사적 감정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함으로써 인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갈 자원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소라와 나나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천만 번도 더 죽은 애자와 함께 살림을 줄여 더 열악한 집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지하 셋방에서의 삶은 시종일관 비참하지 않다. 그곳에서 자매는 소년 나기와 그의 어머니 순자를 만나 이들과 가족 같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순자는 애자를 대신해 소라 자매를 보살피고, 소년 나기는 소라자매의 오빠가 된다. 본래 창고였던 건물에 하나의 벽을 세워 현관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두 개의 셋집이 만들어진 구조는 마치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 각자의 존재이지만, 고립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될 수 있다고 암시하는 듯 보인다. 이 집의 열린 틈으로 서로의 슬픈 사연이 흘러들어가고, 마치 응답인 양 사람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육친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나나의 아이를 중심으로 이후 대안적인 가족을 형성할 것임이 암시된다.

소라, 나나, 나기는 아마도 완전히 이상적인 관계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관계는 미세한 상처들을 안고 있고, 각자는 자기만의 고독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소라는 나나를 사랑하지만, 나나는 소라가 모르는 곳에서 그녀를 증오해왔다. 또 나기는 청소년기부터 어른이 된 현재까지 동급생 소년을 뜨겁게 갈망하지만 이로 인해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선사받은 상처를 간직한 게이이다. 관계 속에 드리운 상처와 균열들은 이성애 혈연가족을 넘어선 대안적 관계에 대한 들뜬 기대를 보여주었던 90년대 문학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소라와 나나 그리고 나기는 각자의 고독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한 채 여전히 나기의 식당에 모여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고독을 위로할 것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희미한 목소리로 삶을 다짐하는 것은 인생의 거창한 명분이나 목표 때문이 아니라 추운 저녁에 같이 잔을 기울일 서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는 이성애주의와 가부장적 가족에 대한 반감조차 보여준다. 계급의 재생산에 주력하는 가부장적 가족은 가족 집단의 이름하에 개인에게 희생과 소외를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미완성의 작품처럼 여겨진다. “있지 인간이 조그만 덩어리도 되지 못하고 부서지고 흩어진 채로 형체도 없이 다만 한줌 무더기가 되고 말 때 그럴 때 인간은 어디에 있다고 해야 좋으니?”(26p)라는 애자의 항변에 대한 답변이 제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질문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파국적 사건으로 윤곽을 드러내고 세월호 이후 깊어진 우리 시대의 절망어린 비명일 것이다. 우리는 와그르르 무너진 건물과 피투성이의 인간을 통해 인간성의 도구화와 윤리 감각의 황폐화를 대가로 이룩한 성장 신화의 허위를 목도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희생자를 어떻게 애도하고, 어떻게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작품 역시 재난이 가져다 준 충격을 암시하듯 삶의 막막함과 무의미를 달래줄 친밀한 커뮤니티를 이야기하지만 사적인 관계망을 넘어 인간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 혹은 공동체에 상상력으로까지 나아갔다고 보기 어렵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아마도 답변이라기보다 탐구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일 것이다. 마치 가까스로 구조된 자가 회복실에 누워 겨우 눈을 뜬 채 희미하게 그렇지만 모종의 결단을 암시하듯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백은 마치 작가적 선언처럼도 보인다. 황정은은 이 작품을 연재하던 중 세월호 사건을 겪었고, 연재가 끝난 후 이야기의 상당부분을 고쳐 쓸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4.16 이전과 이후를 기점으로 글쓰기의 운명 역시 달라질 것임을 암시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함께 아마도 당분간 한국문학에서 매섭게 발열하며 욕망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싸우는 서사적 인간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 혹은 살아있지만 아직 삶으로 완전히 복귀하지 못한 자의 한숨, 비탄, 눈물, 허무 등에 귀 기울이는 것이 재난 이후 문학에 지워진 책무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시대의 문학에 깊은 상실감의 그늘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재구성해야한다는 무거운 압력이 가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비단 문학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물음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좋을 삶은 없기 때문이다.  

 

 글_김은하(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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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황정은 저,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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