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by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소비의 사원을 헤매는 순례자와 침몰 중인 공동체

글작성자 평생학습동향리포트 신청일 Oct 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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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서재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저, 안규만 옮김, 동녘, 2013)

 

아침마다 이메일함을 알면 기억하지도 못하는 ‘친분’(?)들이 보내온 소식들을 접하게 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정하게도 이름까지 부르며 의류 혹은 주방기구의 세일을 알리는 광고문구들이 이러저러한 업무 요청이 적힌 메일들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광고들을 기계적으로 삭제하다가도 한 번쯤 뿌리치지 못하고 열어보는 ‘편지’들이 있다. 그것이 요즈음 내게는 여행사에게 보내온 광고들이다. 산토리니의 고결하기조차한 건축물들과 오키나와의 푸르게 찰랑대는 물결은 영혼을 치유할 사원에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안겨준다. 그래서 그것들은 일정 시간동안 이메일함에 머물며 서둘러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불안마저 유발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듯 현대인의 흔해빠진 에피소드들을 그저 범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행을 비롯한 각종 상품의 유혹과 소비에 매달리는 현대인의 삶은 의혹을 품어야 할 기이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기실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이후 소비에 대한 비판적 진단들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그다지 참신하지 않은 듯 보인다. 우리는 소비가 잃어버린 ‘정치의 광장’을 대신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8-90년대를 지나오면서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에 항의하는 시위대 대신 역 광장이 새로 들어선 쇼핑센터를 향하는 소비자들로 북적대는 것을 우리는 목도해왔다. 바바리코트 한 벌을 찾아 도심 곳곳의 쇼핑몰을 사원처럼 찾아다니는 소비자라는 이름의 순례객들이 우리 자신이다.

그런데도 바우만의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까닭은 그가 ‘소비’ 현상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그것을 자연법칙인 양 여겨 전투의지마저 잃은 현생 인류의 초상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우만의 학문적 관심이 ‘쇼핑’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고령의 사회학자인 바우만은 18세기 유럽에서 최초의 근대인들이 문제제기하고, 이후 근대인이 당연하게 여겨온, 즉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불평등은 사회적 차별의 결과다’라는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점차로 빈곤 혹은 불평등이 개인의 문제로 여겨져 정치적 규제의 대상이 되지 못함으로써(탈규제화) 평등이라는 근대문명의 유산이 상실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20:80은 이미 오래전 일이고, 점차로 세계는 상위 10%의 소득이 전체 인구 90%의 소득을 맞먹는 1:99의 불평등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다. 이는 뛰어난 상위 10%의 눈부신 성취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점점 불평등해지고 있는 증거이다.

 

바우만은 현대인들은 자유주의 경제학의 집요한 주입으로 인해 “부정의의 교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한다고 비판한다. “부정의의 교의”는 지금까지 숙고되거나 제대로 검토된 적이 없지만 마치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 암묵적인 전제들을 의미한다. 이를 테면 ‘경제성장은 함께 사는 데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만능키이다’, ‘소비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가치있는 이는 올라가고 가치없는 이를 배제시키는 것은 사회 정의를 위해 필요하다’ 등등의 교의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바우만은 이러한 믿음들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식의 ‘경제우선주의’를 유포시키고, 기업인들에게 세금감면 혜택을 주는 등 시장에 대한 정부의 오래된 규제와 감시를 풀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간 우리는 기업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게 되면 이들이 경제를 발전시켜 전체사회의 파이가 커질 것이라는 믿음에 홀려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의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바우만은 양극화는 심해졌고, 중산층은 점차로 프레카리아트¹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상층에 축척된 부는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낙수효과’ 이론은 이미 허위임이 드러났다.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화가 돌아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사회적 약자의 파산과 죽음을 방관하고 있다. 정부만이 아니라 탈규제와 개인주의의 심화로 인해 더 이상 사람들은 불평등과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점차로 부자와 빈자는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이들인 양 분리되고 있다. 바우만은 부자들이 “담장 공동체”에 살면서 가난한 자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극화가 심각해져 부자와 가난한 자의 소통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그의 비판은 정당해 보인다. 과연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듯 재벌가 아들과 어여쁘지만 가난한 집 처자가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 러브’가 가능할까? 부자와 가난한 자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학교를 다닌다. 이들은 아마도 한 회사에 근무하면서도 서로 다른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겠는가? 점차로 두 세계의 접점은 사라지고, 부자들은 자신들의 삶이 가난한 자들로 인해 오염되지 않도록 자기들만의 이너 써클을 강화해갈 것이다. 모종의 책임을 묻는 듯한 빈자들의 그림자마저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을 쌓는 것이다.

¹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조어로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파견직 등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등장한 신노동계층을 지시하는 신어이다.

 

바우만에 의하면 쇼핑은 양극화의 부당함을 은닉해주는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 하루 종일 우리는 쇼핑이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는 메시지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텔레비전 홈쇼핑부터 이메일 광고까지 소비가 무아지경의 행복을 안겨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공급받는다. 문제는 이 메시지가 사람들을 진짜(성공한) 소비자와 실패한 소비자로 구분하고 전자에게는 쇼핑이 열심히 산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하게 하고, 후자에게는 굴욕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보다 후자가 겪는 고통이 더 크다. 기실 화려한 상품의 축제에서 배제되고 환영받지 못한 손님들은 수치심마저 느낄 수밖에 없다. 실패한 소비자들은 모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난하느라 불평등에 반대할 힘마저 잃게 된다.
나아가 불평등은 ‘욕망’을 경계해온 인류의 오래된 지혜마저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다. 스키델스키가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에서 말한 바 있는 것처럼 그간 인류는 탐욕은 악덕이며, 일정하게 재화가 충족되면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한 경쟁에서 벗어나 타인과 공생하고 좀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입으로는 우정, 평등, 공생, 정의 등이 인간의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라고 말하지만 기실 더 희소한 재화를 얻기 위한 경쟁에 몰두한다. 그러니 홉스가 말한 것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즉 인간이 서로를 물어뜯는 늑대가 되는 정글의 삶이 회귀해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불평등을 강요당하지 않고, 친구없는 삶을 사는 고독의 징벌을 피할 수 있을까? 바우만은 이렇다 할 해법을 들려주어 위로하고 격려하기는 커녕 공동체를 무너뜨릴 불평등이라는 파국 앞에 우리가 무력하다고 말한다. 우리 중 90%를 차별, 소외, 고독, 자살 등 검푸른 어둠으로 휩쓸고 들어갈 재난을 막아줄 제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등대불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바다 속에서 우리는 무력하게 구조대의 도착을 기다리며 익사 중인 것이다. 그는 “다가오는 파국을 멈출 기회도 희망도 없다. 우리의 행위 능력은 한계에 도달했다”는 섬찟하고 비장한 언어들을 전해준다.
그렇지만 기실 그는 여전히 인간이 생각의 전환을 통해 이 위기를 돌파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 보인다. 그는 근대 합리론의 주창자였던 데카르트를 끌고 들어와 생각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주체라며 의심과 사유활동을 통해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현실’(그에게 현실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믿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믿음이 실제로 물리적인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자유주의 경제학의 “부정의한 교의”들이 틀렸음을 들추어내고 오류를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말로만 우정과 평등을 이야기하지 말고 실제로 그러한 인간적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말과 행위를 일치시킴으로써 나 자신과 세계를 구원하자는 것이다. 인간과 언어에 대한 불신을 한 차례 겪은 탓인지 그의 대안이 너무 빤한 정답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 사회의 위선과 이데올로기들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해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저 개인에게 약간의 우쭐함 즉 우월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빈자는 하루하루 먹고사느라 에너지를 소진하고, 중간계급은 ‘프레카리아트’화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출세의 유혹 속에서 서바이벌에 몰두할 것이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만난 적이 없으니 그들에 대한 공감 능력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불평등을 자연법칙인 양 여기는 “부정의의 교의”에 중독되어 부조리한 현실이 반대자의 저항없이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훗날 친구없는 고독한 삶이 저주처럼 주어진다고 해도 빈곤의 수렁에 빠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회정의를 외면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불평등이 나날이 심화되는 이유들에 대한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불평등에 맞서기 위한 도발적인 전술들이 더욱 필요하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깊은 전율에 휩싸인 적이 있다. 열 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고 버스비가 없어 한 시간을 걸었지만 그가 집에 와 일기를 썼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오늘 하루 소녀노동자들의 고통을 헤아렸는지 성찰하고,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면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은 숙연한 감정을 불러온다. 차별과 불평등 앞에서 재능을 짓밟히고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전태일들은 오늘날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콩도르세는 제도적 차별이 사라져도 불평등은 여전히 남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평등을 해방된 사회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는 빈자에 대한 세금 감면이나 공교육의 실현 등을 통해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인간성을 완성하는 진보한 사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그의 예언은 허망한 낙관이 되고 말았지만 그 메시지는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문명은 기술적으로 진보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웃의 빈곤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던 인간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온 듯 보인다.

 

글_김은하(문학평론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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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저, 안규만 옮김, 동녘, 2013)

 

<목차>

 

들어가는 말

 

1. 우리는 오늘날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
2.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3. 새빨간 거짓말, 그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4.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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