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by 『소년이 온다』 부서진 자의 존엄과 영혼의 증거

글작성자 평생학습동향리포트 신청일 Aug 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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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서재

『소년이 온다』(한강 지음, 창비, 2014)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100p)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2차 세계대전이 인류에게 준 충격의 깊이를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탄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유대인 학살이 벌어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야기하며 생환자(生還者)들만이 아니라 간접체험자의 마음을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을씨년스러운 저녁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밝은 햇살과 여린 꽃잎들이 들어서지 못한 마음의 폐허에서 사랑과 그리움의 노래가 흘러나올 리 만무하다. 이러한 까닭 때문인지 아우슈비츠 이후 유럽의 현대문학은 우울증, 히스테리 등 신경증이나, ‘그로테스크’, ‘검은 유머’ 등 반(反)미학적 상상력에 기대게 된다. 그런데 비록 국적이나 문화가 다르지만 이 질문은 한국인에게도 제법 통렬하게 다가올 듯하다. 80년 5월의 광주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연옥, 즉 아우슈비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주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한국의 작가들은 그것을 재현 불가능한 트라우마(trauma)로 명명함으로써 언어의 무력함을 호소하며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80년 광주는 국가가 무고한 시민을 향해 저지른 잔혹하고도 조직적인 학살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충격적 사건이다. 이는 아마도 ‘광주’가 현대사를 관통하는 충격임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서사화 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항쟁이 지난 얼마 후 황석영은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통해 광주민중항쟁 10일간의 상황을 치밀하게 기록했는데, 이는 ‘광주’라는 사건의 너머, 즉 그 충격의 깊이와 의미가 떠오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요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관계를 낱낱이 밝히고 그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분명 그 자체로 중요한 절차이지만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애도한다는 것은 ‘기록’을 넘어서는 지점이다. 이러한 연유 때문인지 얼마 전 발간된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한국문학의 오래된 공백이 해소된 느낌을 준다. 그저 배경이나 어떤 편린이 아니라 광주항쟁의 체험의 깊이와 의미를 이처럼 온몸으로 붙들어낸 경우는 이 작품이 최초일 듯하다.  

 

한강은 열흘간의 광주의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 “고라니같이 앞으로 수그러진 목”의 앳된 소년을 되살려낸다. 오래 전 광주에서 죽은 동호의 영혼은 여전히 왜 자신이 그토록 아프게 죽어야 했는지, 왜 군인들이 자신을 죽였는지 알지 못해 구천을 떠돌며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나 기실 동호의 귀환은 우리 각자의 심연 속에 거주하는 죄책감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동호와 도청에서의 며칠을 함께 한 은숙, 진수, 선주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화염의 시간 속에 갇혀 있다. 수피아여고 3학년이었던 은숙, 서울의 대학 신입생으로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진수, 서울의 공장 노동자였다가 충장로에 있는 양장점의 미싱사로 일하던 선주는 저마다 항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어린 동호를 집으로 되돌려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고통 받는다. 자신들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동호를 떠나보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동호는 이들의 마음속에 거주하며 출몰하는 유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동호와 이들의 관계는 마치 광주항쟁 희생자와 살아남은 우리 자신의 관계처럼도 보인다. 만약 독자가 스무 살 무렵의 오월에 교정 혹은 거리를 거닐다 불쑥 누군가 함부로 던진 마네킹처럼 널브러진 주검들과 무장한 군인들 앞에서 무릎 꿇린 채 겁에 질린 젊은이의 사진을 마주한 적이 있다면 그때 자신의 영혼과 청춘이 알게 모르게 금이 갔음을 알아챘을 지도 모른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79p)는 은숙이 만든 희곡집에 실린 문장들이지만 마치 광주항쟁 이후의 우리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광주 출신의 작가 한강의 자기 고백처럼도 들린다. 동호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그녀가 살던 광주의 옛 집으로 이사 온 가족의 막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희생자와 광주를 온전히 애도한 것일까? 온전히 떠나보내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 기억해야 할 광주의 진실은 무엇일까? 영매인 양 죽은 자와 남겨진 자를 화해시키는 작가의 글쓰기 전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전쟁, 4․19, 유신 독재, 5․18 등 굵직한 역사들을 포착하려는 야심의 작가라면 사건의 총체적 규모와 세부적 진실을 낱낱이 붙드는 한편으로 그것을 거대한 내러티브와 영웅적이고도 희생적 서사로 재현해내려는 강박관념을 갖기 쉽다. 총체성을 붙드는 것은 리얼리스트의 에토스(ethos) 혹은 진보주의 문학의 서사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강은 그저 다 크기도 전에 훼손된 소년을 독자 곁으로 보내 우리를 그의 누이 혹은 가족으로 호명하며 참담한 슬픔에 공명하게 만든다. 물론 작가 역시 감상적이고 허구적인 멜로드라마로 떨어지기를 경계하는 듯 사실관계에 충실하고자 한다. 유신 말기 YH노조의 여성노동자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진숙 등을 통해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국가폭력의 연속성을 붙들려고도 한다. 그러나 광주는 결코 이념, 정치, 역사 주체 등의 언어로 수렴되지 않는다.

 

만약 개인의 슬픔과 억울함 그리고 분노 등에 공명할 수 없다면 희생자는 역사의 기념비 혹은 승리자의 전리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트라우마는 상처의 핵심에 가닿을 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모욕, 수치 등 상처가 인간의 정신에 가한 폭력의 본질에 천착함으로써 우리를 윤리적인 인간으로 재구조화 내는 작업이 되리라. 이러한 판단을 증명하듯 한강은 인간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되, 그것을 인간의 허약함이 아니라 존엄함의 증거로 제시한다. 진수는 항쟁 후 보안사에 끌려가 육체적, 성적 고문에 시달리고, 결국 기억으로 고통 받으며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 남긴 말은 상처가 허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이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존엄한 존재라는 역설적 의미를 전달한다.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130p)라는 말은 인간이 유리처럼 투명하고 고결해서 숭고하기조차 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렇듯 작가는 희생자를 신비로운 영웅으로 만들기보다는 폭력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한편으로 그것을 통해 역설적으로 환기되는 인간정신의 본질을 가리켜 보인다.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던져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면서 상대의 얼굴을 응시하는 희생자는 자신의 존엄을 기억해내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소년인 동호는 친구인 정대가 무장한 군인들의 총격에 쓰러지자 두려움 때문에 그를 외면한다. 그러나 친구를 외면한 죄책감으로 집이 아닌 도청으로 되돌아간다. 아마도 죄책감은 “가장 깨끗한 양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것은 총과 칼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고귀한 부분이다. 이렇게 볼 때 광주항쟁은 정치적 결단이나 역사주체로서의 자부심을 지닌 용감한 시민의 항거이기보다는 인간성의 깨끗하고 고귀한 부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모든 폭력들의 대명사인 것은 아닐까? 작가가 말하듯이 2009년의 잿더미로 변해버린 용산만이 아니라 1979년의 YH 노조의 벌거벗은 어린 여공들의 몸으로 똥물이 퍼부어지던 여름날도 모두 ‘광주’일 것이다. 유신말기의 노동자였던 진숙은 노동운동가인 성희언니의 ‘노동자인 우리는 존엄한 존재다’라는 말을 끝까지 믿지 못한다. 우리들의 여린 몸에 똥물이 퍼부어지는 데도 어떻게 노동자가, 즉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처럼 인간이 존엄하다는 말이 바보의 어리석음, 허위의 이데올로기처럼 느껴지는 시절도 없을 것이다. 시장의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해고와 실업 등이 난무하자 살아남는다는 것은 수치를 무릅쓰는 일이 되었다. 생존이 정언명령인 양 착각되면서 인간 영혼의 존엄성도 망각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수치의 기억을 안은 사람들이 더 못 견디겠다는 듯 자살을 하며 영혼의 가장 여린 부분들을 항거인 양 드러낸다. 얼마나 더 처참하게 부서지며 자기의 존엄을 증명해야 이 폭력의 어둠이 물러나는 것일까? 동호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환하게 꽃핀 그 곳으로 갈 수 있을까? 

 

글_김은하(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소년이온다.jpg

『소년이 온다』(한강 지음, 창비, 2014)

 

<목차>

 

1장 어린 새
2장 검은 숨
3장 일곱개의 뺨
4장 쇠와 피
5장 밤의 눈동자
6장 꽃 핀 쪽으로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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