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에 부쳐 - 애도를 넘어 성찰로
세월호 참사 앞에서 평생학습은 무엇을 할 것인가
팽목항(彭木港)이 아니라 팽목항(烹目港)이다
삶뿐 아니라 죽음도 이토록 계급적인가.
한껏 들뜬 수학여행, 그네들은 굳이 멀고 험한 바닷길을 선택하였고 그렇게 허망하게 스러진 아이들의 80% 정도가 저소득층이라고 합니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 아들이 어렵게 용돈 이야기를 꺼내 얼마 줄까 물었더니 만원을 달라고 하더라"며 "나는 2만원밖에 주지 못했다"고 눈물을 쏟아냈다는 기사를 읽다보면 가슴이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돕니다.
가정 형편을 알기에 선뜻 입을 떼지 못한 16살 아이의 ‘미안한 1만원’과 움츠린 어깨를 보면서도 더 주지 못하는 엄마의 ‘속상한 2만원’. 그 만원과 이만원 사이에서 펼쳐졌던 엄마와 아들의 삶은 갑작스럽게 한 순간에 정지.
그리고 분향소에 쓰인 글귀는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처연한 아픔으로 밀려옵니다.
"그 동안은 가난했지만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이제 널 보내니 가난만 남았구나."
팽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는 팽목항. 그곳에는 최루성 휴먼 스토리가 끝없이 쌓여 있고 그 위로 마르지 않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넘쳐 눈물바다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는 비단 짠맛의 염분뿐 아니라 분노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고의 순간에는 ‘기다리라’며 탈출한 선원에 의해 팽 당하고, 구조의 순간에는 재난을 재앙으로 키운 정부의 우왕좌왕으로 팽 당하였으니 그곳은 팽목항이 아니라 위급한 순간에 국민을 팽시켜버린, 그리고 온 국민이 그것을 똑똑히 목격한 현장, 바로 팽목항(烹目港)인 것입니다.
무엇이 미안한가, 진짜 미안한가
▲서울 시청 청사 앞에 붙여진 대형 현수막
99년 발생한 씨랜드 참사로 아이를 잃은 올림픽 메달리스트 엄마는 항의 표시로 훈장을 반납하고 실제 이민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제가 태어나고 자란 땅이 아닙니까.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도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뀐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니 단순한 셈법으로만 보면 앞으로는 이 보다 더 참혹한 재앙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도를 넘어서는 성찰입니다. 분야별, 부처별, 기관별, 영역별, 각급 단위에서 그리고 각 지역 마을별로 성찰의 촛불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불빛을 모아 어둠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성찰은 단순한 현상을 넘어 더 근원적인, 구조적인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외부 환경, 사회 시스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월호 앞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를 들여다봐야만 합니다.
그래서입니다.
‘미안합니다’라는 글귀는 사방곳곳에 펄럭이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진짜 미안한가, 도대체 무엇이 미안한가, 미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미안한가라는 벼락같은 질문 앞에 도망가지 않고 맞서야 합니다. 이번 참사에 대해 제 아무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원인을 짚어낸다 한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행동양식과 결부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고 세월호는 흐르는 세월 속에 또 다시 망각의 바다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 가슴 아프게도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 쓴 다음의 글귀는 한국 사회를 향한 직격탄만 같습니다.
“대중의 이해력은 매우 낮으며 잊어버리는 능력은 엄청나다.”
허망한 국가개조론과 평생학습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의 말을 그대로 따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합니다. ‘착한 순종’과 ‘참담한 결과’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심연이 흐르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지금까지 한 달 여 동안 동시대의 사람들은 너무나 생생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말도 믿지 말고 알아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현장학습이자 체험학습인 것입니다. 몰입도와 공감도 측면에서 이 보다 뛰어난 학습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 더불어 살기의 평생학습은 너무나 무기력해만 보입니다.
그렇다고 섣불리 ‘국가개조’로 방향을 틀어서는 안 됩니다. 정부 중심의 국가개조론은 오히려 대증요법의 단기처방으로 끝날 가능성이 클뿐더러 사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규제는 결코 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암 덩어리’도 아닙니다. 그러나 규제를 ‘물리쳐야 할 암 덩어리’로 규정하는 순간 일선 현장에서는 낡은 배의 생명연장이 이뤄지고 증축이 이뤄지고 과적이 발생하고 평형수 빼기가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부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향후 대한민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성찰 없는 국가개조론은 국면전환용으로 밖에 읽히지 않습니다.
국가개조론의 결정적 허점은 관주도형의 21세기 새마을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국가개조론을 들고 나오는 순간 보고하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설정되면서 관료들과 테크노크라트들이 설치게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져야 합니다. 고쳐야 할 것은 전면 수리해야 하고 버려야 할 것은 완전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의 중심이 정부가 되어 탑다운 방식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철저히 시민 중심으로,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시대 평생학습은 무엇인가. 평생학습은 비판적 성찰보다는 착한 시민을 양성하는데 일조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평생학습은 무엇을 이야기하여야 하는가. 아직 거대한 슬픔 앞에서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만 "바뀐다. 온 정성을 다해 하나씩 배워간다면 세상은 바뀐다." 는 영화 <역린>의 대사에 기대어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을 깨고 이야기 해 보려 합니다. 이 상황에서 발언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만 그래도 학자 두 분의 이야기를 한번 담아 보았습니다.
김민호 교수 (제주대학교, 한국평생교육학회 회장)
인간은 불행한 사건에 부딪치더라도 이를 불행으로만 여기지 않고 교훈을 찾아 학습할 수 있는 존재이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희생과 죽음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당대만이 아니라 후손들까지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길 원한다.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탑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무고한 희생자들이 어떻게 죽음에 내몰렸는지 그 과정을 생생히 기록하고, 그 기록물을 전시․보관하는 박물관을 짓고, 역사 교육의 소재로 삼기도 한다.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 정권과 이에 충성했던 사람들이 유태인과 집시, 장애아동, 정치적 반대자들을 조직적으로 대량학살 했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세웠고 홀로코스트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 관련 박물관을 짓고 여러 가지 교육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 필자는 교육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이 지난 50여 년간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며 상호 경쟁하는 가운데 암암리에 내면화했던 ‘교육적 인간상’의 결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기억에 뚜렷이 새겨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우선 세월호 운항 관련 성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아직까지 세월호 침몰과 구조작업에 대한 완전한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인간의 탐욕, 위기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하지 못한 무능함, 자신이 속한 집단에 안주하고 다른 집단과 소통하지 않는 조직 이기주의, 그리고 일의 결과에 대한 공직자들의 책임 회피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의 교육이 경쟁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 실현을 중시했을 뿐, 공동체로 살아가는 ‘시민’의 모습은 간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희생된 학생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동안 입시 경쟁 체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교사가 떠먹여주는 지식을 착하게 받아먹는 ‘순응적 인간’을 바람직하게 여겼을 뿐, 학생 자신의 삶과 이를 둘러싼 객관적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행동하는 ‘자율적 인간’ 형성에는 소홀했음을 알 수 있다.
다행인 것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교육과 학습의 주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육과 학습의 주체를 사사로운 개인에 한정하지 않고 공적 책임을 다하는 세대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엄마들이 특정 자녀의 엄마로서 자기 자녀의 교육 문제에만 골몰하던 차원을 넘어서서 이 시대 모든 젊은이들의 ‘공적 엄마’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대했다. 또 자기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혈연적 차원을 넘어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자녀를 대하려는 '공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일부이지만 청소년과 젊은이들도 체제 순응의 차원을 넘어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가운데 학습의 주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재구조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점에서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의 불행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 시대의 교육 문제를 풀어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민승 교수(한국방송통신대학교)
글을 쓸 시기도 아니고, 글을 쓸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구조적 문제나 타인을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뭘 하자고 종용할 기운도, 기분도 아니었다. 그러다 어제 밤, 글을 쓰지 않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선택임을 문득 깨달았다. 책을 읽다가 모든 거대한 부정과 부패는 최초의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는 증거들에 주목했다. 작은 선택은 한 발짝 차이이지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다른 경사면을 선택한 것과 같기 때문에, 내려와 보면 상대방이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거리로 귀착된다. 지금 상황에서는 무엇이든, 마음 가는 일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작위의 작위를 떠올리며 노트북을 켠다. 평생교육을 생각한다.
그간 나는 평생교육을 ‘개인과 사회를 활력화하는 교육’이라고 규정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괴감이나 허탈감에 빠져있을 때, 평생교육이 시작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시작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손쉽게 평생교육이 사회를 바꾸는 힘이라고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시민이 자신과 사회를 성찰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그 순간이 민주주의라고 믿었지만,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건강한 시민이 되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인적 자본의 관점을 비판했지만, 자격이나 승진 이외의 동력이 충분히 생길 정도의 교육을 구안하지 못했다.
하나. 우리는 학습의 일상성을 강조하면서도 일상의 학습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밝혀내고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선장의 첫 행동을 기억한다. 아이들을 버리고 탈출한 선장은 젖은 지폐를 소중히 꺼내 말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분노했고, 인간도 아니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칠순이 다된 나이가 거론되기도 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아주 단순한 구도로 환원해보면,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돈’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사회에서, 옆 사람의 고통과 분명한 이익 가운데 망설임 없이 ‘옆 사람’을 선택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문화였다면, 승무원들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실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사람 몇쯤은 죽어도 된다는 생각, 나의 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안위는 고민해서는 안된다는 문법,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고, 출세하려면 앞도 뒤도 보지 말고 뛰어가야 한다는 대한민국적 상식이 우리 몸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기억하고, 다시 되새기고, 희생을 철저히 기리고,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무한 존경을 표하는 일이 없는 사회. 그런 ‘일상의 학습’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에 대한 성찰이나 비판도 없었다.
다시 하나. 현재의 주소를 모르므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부자되세요”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강고한 상식을 바꾸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그 상식을 강화하는 교육, 잘해야 상식을 유지하는 교육이 진행되었을 뿐이다. 문해교육에서 인문교육에 이르기까지, 소수자의 주체성을 갖추기 위한 교육이 있었음에도 불구에도, 우리나라에서 브라질의 프레이리 같은 ‘새로운 시도’는 없었다. 대개의 학습동인은 ‘뭔가 더 폼 나는 삶’, ‘억울하게 당하기 않기 위한 배움’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교육은 암암리에, 서서히 배제되었다.
승무원에 대한 직업교육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최소한의 소명의식을 말한다. 하지만 직업교육이 ‘자격을 따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는 문화에서 소명의식을 갖도록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승무원이기 때문에, 내가 선생이기 때문에, 내가 장관이기 때문에 이 사회를 위해 바로 그 일을 해야 하고, 내가 그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소명은 자아정체성, 즉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자기 규정성과 긴밀히 연결될 때에만 그 힘을 가진다. 자아가 직업적 소명과 멀찍하게 떨어져 있는데, 사회적 당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우리 사회에서 직업이란 직업적 소명이 사라진 경제적 보상만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것이고, 교육은 그 끈을 강화시키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절대로 돈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 택시기사들은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자비를 들여 유족을 실어 나른다. 진도 주민들은 생계가 막막한데도 자신의 배를 띄워 기름을 걷는다. 희생자 가족은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러 다시 진도를 찾는다. 이것이 인간이다. 존엄한 인간이다. 그리로 향하게 돕는 일이 교육이다.
또다시 하나. 그래서 작은 실험이라도 했어야 했다. 문화나 사회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사람 하나가 변하면 그 사람과 연결된 네트웍이 변하고, 그 네트웍이 사회가 된다. 그래서 평생교육 실천가들은 평생교육을 변화의 축으로 여기곤 했다. 마을만들기나 생애주기별 시민교육, 자주적 교육실천도 전개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관행과 문화적 습성을 바꾸어내기 위한 새로운 실험, 그리고 그 실험을 전파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없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학교교육의 다양한 개혁안은 성인교육실천에 빚지고 있다. 자기주도학습이 그랬고, 경험학습 부상이 그랬으며, 역량중심 학습이 그러했다. 하지만, 다양한 교육적 실험들이 확산될 때에는 다시 ‘부자와 출세’의 여과지를 통과한다. 왜 자기주도학습인가? 대학을 잘 가려면, 승진을 하려면, 남보다 더 잘하려면...이 답이다. 여과지를 바꾸기 위한 노력과 실험과 확산을 했어야 했다. 아니, 이제라도 해야 한다.
통탄할 일이지만, 사실이다. 성인들에게 ‘어른다움’의 자각이 없다. 더불어 사는 삶의, 교육의 지향점이 없다. 학교는 입시의 틀 속에서 인격을 키우지 않고, 평생교육기관에서는 학습자 입맛에 맞는 교육을 제공한다. 직업이나 승진, 자격만 있지, 인간의 성장, 인격적 관계는 교육의 목표에서 사라졌다. 사회의 공적 가치가 개인적 삶의 진정한 기초라는 인식이 없다. 아이들은 ‘그대로 있어라’를 십여 년씩 배웠고, 배운대로 따르다 죽음을 당했다. 학습자 주체성이 무엇인가? 간단하다. 어떤 자리에 있건 존중받아야 한다는 거다. 비차별-비편견에 기초한 배려의 확산. 그것이 평생교육이다. 우리 눈에 강력하게 붙어있는 업적과 경쟁의 여과지 자체를 바꾸는 실험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필요했던 것이다. 철저한 반성 없이는, 우리는, 어느 틈에 다음세대를 밀어제끼고, 구명선에 올라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집단적 존재이다. 나의 존재감은 타인에 의해 부여된다. 절대 고독, 절대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타인이 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곁의 누군가가 없이는, 그 수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상담이라 불러도 좋고, 치유, 치료, 기도, 교육, 그 어떤 이름도 좋다. 옆이 곁이 되어야 한다. 시작하자.
인간은 언제나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우리사회에서 숭고한 삶에 대한 존경과, 생존을 넘어서는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졌다. 나에게는 선실에서 친구들에게, 구명조끼도 없이 도로 뛰어 들어간 그 어린 친구 같은 마음과 습성이 있는가. 아무도 학생들이 바라보던 유리창을 깨지 않았고, 자기 몸을 우선 챙기고, 젖은 돈을 말렸다. 민낯의 직면.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래서 우선은 나를 돌아본다. 내 안의 여과지를 내 곁의 사람들과 함께 바꾸어 나가는 일을 조금이라도 해야 한다.
“너희를 잊지 않을께.”
노란 리본의 말이 희미하게 변색되게 두어서는 안 된다.
STOP- KOREA, OPEN- YOUR EYES
심청이는 눈먼 아비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인당수에 자발적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300여명의 진도 앞바다 사망자는 부도덕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희생양입니다. 하지만 이번 참사를 통해서도 변하고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는 더 큰 희생양을 만들고야 말 것이며 우리 국민은 참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미개한 국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참사를 통해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무를 모두 다 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기에 세워야 합니다. 성장만을 향해 돌진하는 대한민국호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어디로, 어떻게 갈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심연 저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양심의 눈을 떠야 하고 내 옆의 고통과 호소에 외면했던 눈을 떠야 합니다.
누구인지는 모릅니다만 작가는 심청전을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300여명의 속죄양을 만들어 낸 이번 세월호 참사의 스토리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마무리될지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해피엔딩으로 쓸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 그 스토리를 써 나가는 작가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각자라는 것을.
명복이란 죽음 이후에 받는 복을 말합니다. 그러니 살아남은 자가 비는 명복이란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은 명복을 비는 수밖에 없는 이 처연한 세월 속에 삼가 머리를 조아려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