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서재
『동물로 산다는 것』(존 쿳시 저, 전세재 옮김, 평사리, 2006)
사회과학과 문학의 거리는 꽤나 멀게 느껴진다. 단지 거리가 멀다는 느낌뿐 아니라, 사회과학과 문학 사이에는 공유될 수 있는 요소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 영역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과학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을 분석하고 사실에 근거한 과학적 예측을 다루지만, 문학은 ‘사실이 아닌 것’ 즉 픽션이라는 허구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고 간주한다. 아무리 두 영역이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간에 의해 인간세계를 다루는 정신 활동이라는 공통점을 지녀도, 각 영역이 다루고 있는 대상의 성격이 대조적이기에 문학은 문학일 뿐이며 사회과학은 사회과학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확고하게 분리되는 것 같은 두 영역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다. 존 쿳시(John Maxwell Coetzee)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쿳시는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다. 하지만 쿳시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그와 문학상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존 쿳시의 지적 능력과 성취가 과대평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 그리고 그 영역을 다루는 그의 솜씨와 형식이 갖는 독특성이 우리가 흔히 문학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그의 책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분명 소설이지만, 그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세뇨르 C를 통해 쿳시가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해 펼치는 주장은 그 어느 사회과학자보다 사회과학적이다. 이 소설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은 그 어느 사회과학 서적보다 사회과학적이지만, 그 사회과학적 내용은 매우 문학적인 형식, 그것도 실험적 형식을 통해 펼쳐진다. 매우 사회과학적인 내용이 매우 문학적인 형식과 결합되어 있는 묘한 긴장감 때문에, 우리는 쿳시를 단순히 문학의 장르 안에 가둬 둘 수 없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대체 그는 소설가인가? 아니면 사회학자인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묻고 있는 『동물로 산다는 것』 역시 유사한 질문을 독자로 하여금 던지게 만든다. 『동물로 산다는 것』에서는 채식주의부터, 공장형 동물사육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윤리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현재 우리가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행하고 있는 논의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쿳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점만을 강조한다면, 『동물로 산다는 것』은 분명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에 펼쳐지고 있는 내용에 주목한다면, 『동물로 산다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범위를 벗어나 어느새 사회과학의 영역에 도달해 있다.
『동물로 산다는 것』에는 현실과 픽션이 뒤섞여 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인간가치연구소》가 쿳시에게 강연 초청을 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쿳시는 이 강연에서 소설 형식으로 강연을 했다. 쿳시가 실제로 행한 이 강연에는 또 다른 가상의 강연이 들어 있다. 쿳시는 강연 속의 강연을 했다. 강연 속의 강연에서 가상의 인물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애플턴 대학”이라는 가상의 대학으로부터 게이츠 연례 강연에 초청을 받고, 그 강연 속 강연에서 ‘동물권’에 대해 강연을 한다. 쿳시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서 강연 속의 강연을 또 진행했기에 『동물로 산다는 것』에 등장하는 강연은 독자를 혼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동물로 산다는 것』 속에서 어디까지가 사실과 관련이 있는지, 또 어떤 점이 픽션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 강연 속 강연을 행하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동물권’에 대한 급진적 주장의 어느 부분이 실제 인물 존 쿳시의 생각인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강연 속 강연에서 주장하는 ‘동물권’에 관한 어떤 내용이 실제 인물 존 쿳시와 거리가 있는지 독자들은 도저히 평가할 수 없다.
평가할 수 없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실과 픽션 사이의 경계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장치들이 『동물로 산다는 것』에 들어 있다. 이 책의 가상 인물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철학자와 동물’ 그리고 ‘시인과 동물’이라는 주제로 “애플턴 대학”에서 행한 두 가지 강연에 대한 이야기와 네 명의 또 다른 학자들이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행한 강연에 대해 논평을 하는 ‘뒤집어 보기’라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강연 속 강연에서 사실과 픽션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뒤집어 보기’라는 부분에서도 사실과 픽션을 독자들은 구분해낼 재간이 없다. 마저리 가버(Marjorie Garber)라는 문학평론가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강연은 우리 시대의 가장 절박한 윤리적 정치적 문제를 제기한다고 평가한다. ‘뒤집어 보기’의 두 번째 부분에서 철학자 동물권을 옹호하는 철학자로 유명한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자신보다 더 급진적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로 등장한 종교학자 웬디 다니거(Wendy Daniger)는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것과 동물에게 동정으로 대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영장류동물학자 바바라 스멋(Barbara Smuts)은 실제 삶에서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언급하지 않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공백을 지적한다.
‘뒤집어 보기’에 등장하는 네 편의 글은 학문적 글일까? 아니면 네 편의 글 역시 쿳시가 만들어낸 가상의 이야기일까? ‘뒤집어 보기’에 등장하는 네 편의 글은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네 편의 글은 네 명의 각 분과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강연 속의 강연에 대한 실제로 있었던 평론일 수도 있고, 쿳시가 만들어낸 가상의 평론일 수도 있다. 처음에 쿳시라는 소설가의 소설이라는 판단 하에 『동물로 산다는 것』을 읽기 시작한 독자는 ‘뒤집어 보기’에 이르게 되면, 대체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소설인지 혹은 사회과학 서적인지 알 수 없는 판단불가능의 세계에 빠진다. 독자를 판단 불가능의 세계에 빠뜨리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과 허구를 뒤섞는 쿳시의 기법 탓만은 아니다.
『동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물권에 대한 어떤 일관된 주장을 찾아볼 수 없다. 『동물로 산다는 것』에서는 동물권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나열되어 있기에 독자는 대체 어느 입장이 『동물로 산다는 것』의 작가인 쿳시의 입장인지 알 수 없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이 책에 나열되어 있는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근거하여 독자가 스스로 동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는 것뿐이다. 이로써 쿳시는 소설을 기대했던 사람을 사회과학적 서적의 논평자로 바꾸어 놓는다. 그렇기에 『동물로 산다는 것』을 읽기 시작한 독자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뜨거운 논쟁에 자기도 모르게 휘말리게 된다. 사회과학서적인지 문학서적인지 여전히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동물로 산다는 것』의 힘이 바로 이것이다. 때로는 혼란이 생산적인 경우도 있다.
『동물로 산다는 것』(존 쿳시 저, 전세재 옮김, 평사리, 2006)
<목차>
철학자와 동물
시인과 동물
뒤집어 보기 - <동물로 산다는 것>
시로 도살장을 폐쇄시킬 수 있다고?
불이 나면, 아빠는 누구를 구하실까?
자네는 어찌 물고기가 즐거운지를 아는가?
'인간이 아닌 인격체'와 친구하기
작품 소개
옮긴이의 글